훼손된 태극기 /연합뉴스
훼손된 태극기 /연합뉴스

벌써 20년이 흘렀다. 2001년 9월 11일 세계 최대 강국 미국에서 2977명이 사망하는 테러 범죄가 발생했다. 뉴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시멘트로 뒤덮인 거리는 소방차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터가 됐다.

사건 발생 4일이 지나서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현장에 등장했다. 뭐라고 했을까. "테러범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잡아 오겠다. 전 세계가 우리의 비명을 들었다. 이 비참한 사태를 일으킨 자들도 곧 우리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정부의 잘못이라는 말은 없이 복수의 다짐만 부시는 간결하게 전했다. 승자독식제 혜택을 본 대통령이란 비판을 받던 그는 미국인의 '자부심'을 건드렸고 지지율은 치솟았다. 국민은 환호했고 야당 의원도 모두 부시를 향해 손뼉을 쳤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전 세계를 뒤흔드는 강대국이 민간 비행기 납치 테러를 왜 막지 못했을까. 공항 보안이 이토록 허술했을까. 테러범이 버젓이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데 공항 관계자는 뭐 했을까. 공군 참모총장은 미국 땅에 납치된 비행기가 돌아다니는데 왜 손을 못 썼을까. 심지어 지구방위대 '미국'의 심장인 국방부까지 테러당했다. 세계 제1국가의 머리가 뚫린 것이다.

책임자를 엄벌해야 한다. 그것도 뉴욕 한복판에서 테러가 발생했는데 이건 전쟁 일촉즉발인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퇴임하거나 해임되지 않았다. 심지어 부시는 탄핵도 당하지 않았다. 딕 체니 당시 미국 부통령은 사건 이후 8년간 자리를 지켰다. 관련 부처 장관 모두 사건과 무관하게 4년 길게는 6년을 더 일했다. 콜린 파월도 게일 노턴도, 도널드 럼즈펠드도 당당히 자리를 지켰다. 미국 국가 보안의 심장 CIA 국장은 7년을 더 버텼다. 

야당은 '도의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부시에게 탄핵 압력조차 가하지 않았다.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 생기면 이를 보완하는 데 집중하겠단 것이 이들의 상식이다. 원인 규명에 힘쓰고 재발 방지에 목숨을 건다. 사람 하나 자른다고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단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야당이 다음 정권을 잡았고, 오바마는 빈 라덴을 기어코 사살하고 만다. 여·야를 막론하고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태원 참사, 오로지 국가 잘못!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느 때처럼 서로 대립하고 있던 한국 정치판은 순식간에 얌전해진다. 여·야는 모두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에 노력한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분향소에 등장한 여야 대표는 엄숙한 표정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쪽에서 소리친다. "오로지 국가 잘못이다. 추모의 시간이 지났다. 총리 사퇴를 포함해 국정 전면 쇄신이 필요하다." 다른 쪽에서도 바쁘다. "경찰 배치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뜨거웠던 냄비는 다시 금세 식어버렸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악의 사건은 한국 정치인 입을 통해 정쟁거리로 변질한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93년 10월 10일. 292명이 바닷가에서 사망한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안전사고 예방 대책을 소홀히 한 탓에 발생한 전형적인 인재로 꼽힌다. 선박 출항 당시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무리한 출항을 감행했다. 기상청에서도 사고 당일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부니 선박에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경고했다. 

게다가 정원 외 141명이나 초과 승선했는데도 감독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290여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고 만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비판받다 이계익 교통부 장관과 노태섭 해운항만청장을 경질한다. 정부의 무능한 대응이란 언론 보도도 나왔다. 그래서 재발 방지 대책은 마련됐을까.

2014월 4월 16일. 또 바다에서 침몰 사고가 발생한다. 세월호였다. 이번엔 299명이 사망했다. 선박 과적 논란, 기상 악화에 무리한 운항, 일본에선 출항이 금지된 선박을 수입해 개조했다는 등 논란이 시작됐다. 서해페리호 사건을 겪었지만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사고 후 누가 출동하고 어떻게 구조할지 매뉴얼조차 없었다. 수백명의 어린 학생이 배 안에 탄 채로 물에 잠겨가는 광경을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정홍원 국무총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야당은 대통령이 사고 직후 7시간 동안 뭐 했느냐를 밝히는데 혈안이 됐다. 이에 맞서 보수단체는 야당 계열 시장 고발로 맞불을 놨다. 여야 모두 책임자 단죄에만 정신이 팔렸을 뿐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무관심했다.

사고의 진실을 규명한다며 8개 국가기관이 아홉 차례에 걸쳐 조사를 벌였지만 정작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같은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고쳐야 하며 이를 누가 맡아서 책임지고 관리할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세월호 조사위는 3년 6개월 동안 572억원을 퍼붓고도 결국 명확한 결론 없이 올해 6월 10일 활동을 끝냈다. 

2022년, 이태원 참사는 다시 희생양 찾기에 분주하다. 야당은 헛다리를 짚고 있다. 원인이 무엇이었지 밝히기보다 장관 날리기에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이태원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를 위한 법안을 냈다는 야당 의원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러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재발 방지책은 흐지부지되고 비슷한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허둥대지 않을까.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 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처벌받아 마땅하다. 이 또한 재발 방지를 위한 과정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선 안 된다. 원인을 밝히고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장관 자리에 앉든 사고는 또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관 하나를 날리느냐 마느냐에 여야가 '올인'하고 있는 형국을 보노라면 이번에도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물고 늘어지다 정작 사고의 원인은 밝히지도 못한 채 국민은 언제 꺼질지 알 수 없는 살얼음판 위로 다시 내몰리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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