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가 임명한 볼커, 레이건 시대 주역
3년 만에 물가상승률 19→3%로 잡아
볼커 역할 떠안은 파월···향후 정책은?
인플레이션은 경제체제 내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경제성장이나 번영을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현상도 아니다. - 머레이 라스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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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만에 스태그플레이션 시대가 돌아왔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 금리를 0.75% 포인트 인상한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파월에게 레이건 시대 폴 볼커의 역할을 요구할 만큼 글로벌 경제가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도 연방준비제도(Fed)가 볼커를 소환해 초고강도 금리 인상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시 소련과 동유럽이 겪었던 위기는 비기축통화국인 신흥국에 곧바로 닥칠 전망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자동현금인출기(ATM)로 불리는 한국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국내외 경제는 1970~1980년대와 데칼코마니 양상이다. 여성경제신문이 당시와의 유사점을 살펴보고 미국의 긴축 정책이 국내외 경제에 미칠 영향을 다섯 차례에 걸친 시리즈로 짚어본다. [편집자주] ① 반세기 만의 스태그플레이션과 자이언트 스텝 |

미국 8.6%, 영국 9%, 유로 지역 8.1%, 한국 5.4%···. 지난 5월 각국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다. 한국은행의 인플레이션 목표치 2%를 몇배나 넘어선 전세계적 물가상승 현상에 대해 세계은행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당시 상황과 유사하다"고 진단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6월 15일 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0.75% 인상한 데 이어 추가 인상을 예고했다. 제롬 파월 의장이 "다음 회의에서도 0.5%포인트 또는 0.75%포인트 인상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언급하면서 자이언트 스텝 역시 반세기 만에 도래한 것.
미국 역사상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공인된 시기는 1970년대뿐이었다. 인플레이션율은 15%까지 뛰어오르고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다.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사람이 제12대 연준 의장 폴 볼커(Paul Volker)였는데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현재 제16대 의장 파월 의장에게 세계 경제의 운명이 달렸다.
볼커를 한마디로 소개하면 브레튼 우즈 체제 붕괴와 함께 위기를 맞은 미국의 달러 패권을 원위치로 돌려놓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볼커가 취한 초고금리 정책의 배경은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단행한 '금환본위제 폐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닉슨(1969–1974) 재임 기간 금 태환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축통화의 위력을 자랑해온 달러가 휴지조각이 됐다. 1온스당 35달러로 묶여 있던 금 가격은 120달러로 폭등했다. 그러자 금과 교환되기 위해 찍어낸 달러가 시중 유동성을 부풀리면서 인플레이션이 경제를 뒤덮었다.

1979년 미국 경제는 베트남 전쟁에 1차·2차 석유 파동까지 겹쳐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지미 카터(1977–1981) 정부는 달러화 가치 안정을 위해 다른 정책적 고려 사항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케인지언이었던 카터가 매파의 상징인 볼커를 연준 의장으로 임명한 배경이다.
볼커는 1979년 8월 임기 시작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취임 두 달 만인 10월 6일 연준의 정책 금리를 10.94%에서 13.77%로 2.83%포인트 올리는 조치를 단행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이듬해 4월까지 정책금리를 17.61%까지 끌어올리면서 물가를 안정화시켰다. 그 결과 1980년대 13.5%까지 고공행진하던 인플레이션율이 1년 만에 10.33%까지 낮아졌다.
반면 인플레이션이 잡히자 일시적인 경기 침체가 발생했다. 그 결과 재선에 나선 카터는 낙선하고 당시 긴축을 비판했던 로널드 레이건(1981–1989)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뽑혔다. 결과적으로 볼커와 카터의 동거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볼커가 인플레이션은 잡았지만 카터 정권도 잡았다"는 말이 나돌았다.
다만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볼커의 진가는 레이건 집권기 더욱 빛났다. 그는 10%대 물가상승율을 내려잡기 위해 1980년 7월 정책금리를 9.3%에서 19.7%까지 무려 10%포인트 이상 올리면서 악명 높았던 스태그플레이션을 종식시켰다.
달러의 매력을 높여 외국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먹혀들었다. 물론 초고금리 정책으로 인한 고통은 3년 가까이 지속됐지만, 그후 수십년의 골디락스(Goldilocks) 시대를 열었다. 1983년 물가상승률은 3.2%까지 떨어졌고 1980년 4월 817포인트까지 추락했던 다우지수가 1983년 3월 1130포인트까지 상승했다.

비기축통화 신흥국선 자본유출 불가피
달러 위력에 소련 사회주의 체제 붕괴
민주당 출신 볼커는 레이건과 금리 인상에 대해선 견해가 일치했지만 그가 펼친 신자유주의 정책과 충돌이 잦았다. 금융 정책에서 규제를 중시한 볼커는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글래스 스티걸'법 완화를 반대했다. 갈등 끝에 레이건은 1987년 금융 규제 완화론자인 앨런 그린스펀을 임명하고 최대한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통화주의(monetarism)로 선회했다.
통화주의는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선택할 자유>의 저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한 정책이다. 그는 후버 전 대통령 시절 대공황이 10년 이상 장기화한 원인을 연준이 소극적인 통화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시작된 통화주의 기조는 매파로 분류되는 앨런 그린스펀에 이어 비둘기파인 벤 버냉키·재닛 옐런으로 이어졌다.
볼커의 금리 인상으로 달러는 강해졌지만 지구 반대편에선 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영국·서독으로부터 외채를 끌어다 쓴 동유럽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엄청난 이자 상환부담을 떠안았다. 1982년 멕시코의 데킬라 쇼크(외채 위기)를 시작으로 다수 국가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순식간에 10%포인트대로 올리는 동안 금리 인상 계획조차 잡지 못한 국가가 대분이었다. 이런 가운데 초고금리는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으로 대표되는 소련 붕괴 공작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동인이 됐다. 국제 정치에서 데탕트(Détente)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의 시대가 저물고 네오콘(neocon)이 주류로 등장했다.
환율 요동치는 한국도 예외 아냐
볼커와 레이건이 구축한 달러 패권은 오늘날 신흥국들에게도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달러는 전 세계 외환거래의 88% 결제율을 자랑하는 기축통화(reserve currency)다. 이같은 달러에 비해 경쟁국 통화는 불안정한 비안전자산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가장 많이 풀린 돈이 달러이니 미국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본지 조사 결과 중요 6개 통화 대비 미국 달러의 가치를 보여주는 명목 달러 인덱스(Nominal US Dollar Index)는 2021년 1월 코로나로 돈이 풀리기 이전(2020년 1월 1일)보다 16.1포인트 오른 111.2를 찍더니 올해 5월엔 120을 넘어섰다. 가장 많이 풀린 돈 달러의 가치가 22.5%나 높아진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달러 초강세가 다른 국가의 자본유출을 부른다는 점이다. 국제재무연구소(Institute of International Finance) 분석 결과 코로나19 공포가 절정이었던 3월 한달 동안 신흥국에서 830억 달러의 자본유출이 발생했는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보다 크고 빠른 유출이었다.
자본유출 위험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2000명으로 급증하며 한미통화스와프 체결이 불투명했던 2020년 3월 원달러 환율이 1300원 가까이 치솟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김용범 전 기재부 차관은 "서울 외환시장에선 달러를 팔겠다는 주문이 1분간 단 한 건도 없이 3월 19일 하루 만에 50원가량 올랐다"며 "공직생활 중 경험한 가장 긴 하루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볼커 이후 미국이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건 정부의 무리한 감세 조치 결과 1985년엔 재정수지와 무역수지가 쌍둥이 적자를 기록하면서 30여 년 넘게 이어져 온 미국의 무역적자 누적의 단초가 됐다.
1985년 쌍둥이 적자가 심화하자 미국은 달러화 강세를 완화하고 무역 수지 개선을 위해 당시 수출 강대국이던 일본과 엔화 절상 등을 내용으로 한 플라자합의를 이끌어냈지만 일본이 장기 불황으로 접어들면서 '리밸런싱'에 실패했다.
무역수지 적자로 빠져나가는 달러만큼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은 공개시장 조작을 통해 달러화를 끊임없이 발행해야 했다. 그렇게 찍어낸 달러는 각국 중앙은행이 미국 국채를 대량 매입하는 방식으로 소화됐다. 외국으로 빠져나갔던 달러는 미국으로 되돌아와 미국인들에게 저금리 모기지(mortgage, 자산담보대출)로 대여됐다. 이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인이 됐다.

파월에게 주어진 통화주의 극복 숙제
한국선 김재익이 28%→3% 물가안정
미국이 빚을 져가며 완충역할을 하던 시대도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자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주도하는 양적완화 시대가 본격화됐다. 그렇게 풀린 돈은 그만큼 거둬들여야 했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쇼크가 왔다.
반세기 만에 돌아온 스태그플레이션 시대는 미국 연준이 6월 15일 자이언트 스텝을 취하면서 본격적인 서막을 올렸다. 뒤늦게 금리인상에 뛰어든 파월 의장도 통화주의 시대 극복을 위해서라도 볼커의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미국의 스태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정책의 영향권에 있던 1981년 한국 경제도 물가상승률이 28.7%까지 치솟는 등 여파가 심각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권으로 볼커와 생각을 함께하는 경제전문가가 등장해 경기 침체의 파고를 넘을 수 있었다.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금리인상과 재정긴축, 임금억제를 통해 물가를 안정화시키는 동시에 경제 체질 개선에 나섰다. 정부의 규제에서 탈피해 시장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공을 들였다. 이와 함께 박정희 정부의 수출 지상주의 정책에서 급선회해 수입 개방도 병행한 점에서도 당시 보호무역을 주창한 레이건과 차별성을 보였다.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수석은 1981년 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물가 안정을 위해 사상 처음으로 예산을 동결하고 '제로 베이스' 예산 편성 제도를 도입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다시 말해 유동성 파티의 가능성을 차단한 결과 1983년 물가상승률을 3.5%까지 떨어뜨릴 수 있었고, 그 무렵부터 시작된 민간주도 성장 정책이 한국 경제성장의 밑천이 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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