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여강길 11코스에서 만난 보더콜리
떠돌이 대형견과 걷기, 길 위의 연대감
함께 걷는 기적, 짖지 않고 말하는 개

"저렇게 큰 개를 목줄도 없이 뛰어다니게 하면 어떻게 해!”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던 거 같다. 두 마리 반려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애묘인이지만 개는 무서워하는 편이다. 짖는 소리에 놀라게 되고 어쩐지 달려들어 물 것 같다는 생각에 예뻐도 손을 잘 대지 못하는 편이다. 대형견 공포증마저 있는 내게 그 개는 송아지만 하게 보였던 것 같다.

혼자 여강길 11코스를 걸었다.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더운 날이었다. 주록리 마을 길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커다란 몸집의 개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너무 무서워 혼비백산했는데 개는 자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더 사나워진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무관심한 게 상책이라는 말이다.

등과 목은 뻣뻣하게 굳고 머리카락이 바로 서는 느낌이지만 안 그런 척 보폭을 유지하면서 걸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면서 소리쳤다. "제발 저리로 가. 제발 가까이 오지 말라고!" 커다란 몸집의 보더콜리였다. 몸통으로 내 종아리를 스치는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서 혼절할 뻔했는데 바로 다음 순간 녀석은 나를 5m쯤 앞서갔다.

'마을 개가 산책을 하는 거겠지,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이겠지' 혼잣말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걸었다. 온통 내 신경은 개에게 있었다. 그 녀석은 앞서 가면서 계속 나를 돌아봤다. 마을 길을 걷는 동안 집이 나타나고 지나칠 때마다 이 집 개도 아닌가? 얘는 언제 사라지는 거야? 그런 생각만 했다. 

3㎞쯤 걸었더니 얕은 계곡물이 바위 사이를 돌아 흐르며 종알거린다는 ‘이야기소’가 나왔다. 녀석이 뛰어 들어가 물장구를 치며 놀기에 나는 비로소 따돌릴 기회다 싶어서 냅다 서둘러 뛰었다.

가파른 길을 헉헉거리며 녀석을 벗어났나 했는데 어느새 따라온 개는 아까처럼 5m 전방에 자리를 잡더니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제야 이 녀석이 함께 가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를 안내라도 하려는 건가? 라고도···. 

다행히 녀석은 짖지 않았고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녀석이 사라져 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고 걷기로 했다. 바로 계속 오르막이 가팔라져 다른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녀석도 무척 힘들어 보였는데 가다가 앉아서 헐떡이며 쉬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몸통은 뚱뚱하고 귀는 뒤로 말려있다. 모양새는 얼핏 돼지와 닮은 것도 같아 우스웠고 같은 길을 함께 가는 도반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역시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려움을 함께하면 생기는 연대 의식 같은 걸까? 조용하게 앞서 걸으며 5m 10m 간격을 두는 녀석이 조금씩 기특하고 신기했다.

여강길 11코스는 동학의 길로 부른다. 교주 최시형의 묘소가 있다. /사진=박재희
여강길 11코스는 동학의 길로 부른다. 교주 최시형의 묘소가 있다. /사진=박재희
여강길에서 우연히 만난 보더콜리 /사진=박재희
여강길에서 우연히 만난 보더콜리 /사진=박재희

“여기 산 속이야. 너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걸. 어디까지 갈 꺼야?” 

나는 급기야 녀석 뒤통수를 향해 이런 말도 건네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녀석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궁리했다. 순하고 퉁퉁하며 귀여운 개.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가 그냥 여강길에서 만났으니 여강이로 부르기로. 이제 그 녀석은 나에게 여강이가 된 것이다.

개울이 나타나면 물을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언덕길을 올라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보고, 힘들어진 내가 늦어지기라도 하면 나를 찾아 숲길을 다시 돌아오기까지 하면서 파트너가 되어줬다. 어느 순간 녀석의 뒷모습이 뭉클했다.

제법 깊은 숲, 꽤 가파른 길, 아무도 없어서 두려운 숲길에서 앞서가는 녀석이 그대로 의지가 되었으니 신기한 경험이다. 여강길 11코스에는 동학의 교주 최시형 선생이 묻혀있다. '하늘과 땅 자연과 모든 생명이 동일하게 서로 님이며 소중하다'는 그의 가르침을 나는 오늘 여강이를 통해 느끼고 있다. 

네 시간 동안 여강이는 나를 기다리고 살피고, 함께 힘들어했고 11코스를 끝까지 함께 걸었다. 내가 물을 마시는 동안 녀석은 개울물을 마셨고 가져간 빵은 나누어 먹었다. 탁 트인 공간, 너른 절개지만 나타나면 녀석은 나뭇가지를 물고 와 놀자고 건네며 조금 짖었다.

개 짖는 소리는 여전히 나를 두렵게 했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페치 게임, 가져오기 놀이를 여강이와 했다. 여강이의 수고를 조금 갚아주고 싶어서. 원할 때마다 할 수는 없었지만 나무토막을 던지고 뺏기 놀이를 하면서 여강이는 기쁜 눈치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낮은 매기를 넘어 마을로 내려와 물구름 다리를 건넜을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개가 표정으로 말하고 사람만큼 환하게 웃는다는 것을 알았다. 여강이가 뿌듯한 표정을 짓더니 더할 수 없이 환하게 웃으며 가까이 달려오더니 말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무사히 잘 돌아왔네. 이렇게 전부 걸은 건 나도 처음이야. 참 힘들었는데 잘했다. 그렇지? 너도 즐거웠지?”라고. 나는 여강이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남아있던 빵을 모두 여강이에게 줬다. 녀석은 빵을 먹지 않고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웃는다. 어쩌면 빵보다 함께 부비며 축하해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아직도 안아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내가 붙여준 개 이름은 여강. 여강길 11코스 전체를 나와 함께 걸었다. /사진=박재희
내가 붙여준 개 이름은 여강. 여강길 11코스 전체를 나와 함께 걸었다. /사진=박재희

마을을 떠나오는데 이번엔 여강이가 나를 앞서가지 않고 뒤따라왔다. 마을 어귀까지 따라오는 여강이. 그 길은 내가 한 걸음마다 계속 뒤돌아 여강이를 보며 걸었다. 따라오던 여강이는 개울이 시작되고 마을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여강이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고 나는 마을 어귀에 서서 한참 여강이를 바라봤다. 맴돌며 그 자리에 선 여강이에게 나는 소리치며 돌아가라 손짓했다.

"여강아 이제 집으로 가. 이제 돌아가. 얼른 가."

몇 걸음 가다 돌아보았는데 여강이는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여강아 오늘 너무 고마웠어. 다음에 꼭 다시 올게. 빨리 가."

여주에 있는 여강길: 남한강(여강) 주변 140㎞의 도보길 /사진=박재희
여주에 있는 여강길: 남한강(여강) 주변 140㎞의 도보길 /사진=박재희

아무리 소리쳐도 여강이가 돌아서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내가 돌아서서 뛰었다. 이럴 수가! 무섭다고 몸서리를 쳤던 내가 헤어지는 아쉬움에 계속 눈물을 찍어냈으니 나의 대형견 공포증은 치유된 것이다.

함께 걸어주는 여강이. 녀석의 몸통은 좀 퉁퉁하고 조용하면서도 명랑하다. 힘들어하면서도 걷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해주는 보더콜리. 혹여 여강길을 걸을 요량이면 만나보시길.

여강길 11코스가 있는 마을 주록리, 동학의 길 마을 어딘가에 살고 있을 녀석이 보고 싶다. 녀석을 다시 만나 함께 걷고 싶어 이 더위가 지나면 주록리에 다시 갈 생각이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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