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로마 이전의 로마, 신비의 문명
잊힌 3000년의 문명 고도시
토스카나의 조용한 심장, 볼테라

볼테라 언덕에서 보는 토스카나 평원 /사진=박재희
볼테라 언덕에서 보는 토스카나 평원 /사진=박재희

토스카나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차를 몰고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다 마주한 풍경은, 단순한 표현 '전원' 그 이상이었다. 초여름의 태양은 은근했고, 공기는 상쾌했고, 구릉과 낮은 언덕은 초록의 파도처럼 부드럽게 출렁였다. 그 곁을 조용히 지키고 선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람들은 왜 그 나무를 잊지 못한다는지 그날 알게 되었다. 토스카나를 여행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늘씬하게 하늘로 자라난 사이프러스를 잊지 못하겠다고들 했다.

사이프러스가 곧고 날렵한 선의 미학이라면, 나는 사실 로만 파인트리를 좋아한다. 사람이 자기를 닮은 걸 좋아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세련된 느낌의 사이프러스에 비하면 로만 파인트리는 나처럼 두리둥실 둥글고 느긋하다. 엉뚱한 유머 감각이 있을 것 같은 그 나무가 떠오른다. 시원한 사이프러스 가로수를 지나며 어깨가 넓고 머리에 구름을 얹은 듯 둥글게 펼쳐진 그 로만 파인트리를 떠올리긴 했지만, 볼테라를 그렇게 맞이했다.

사이프러스 나무 가로수 /사진=박재희
사이프러스 나무 가로수 /사진=박재희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난 고도시(古都市). 놀랍게도 이 조용한 도시는 무려 3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다. 로마 이전의 문명 에르투리아, 문자는 남았지만 언어는 사라져 정확히 해독할 수 없는 신비의 문명을 이룬 에르투리안들이 세웠다는 볼테라는 기원전 8세기부터 번성한 에트루리아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지금도 도시 외곽에는 거대한 성벽과 에트루리아식 아치문이 남아 있는데, 그들의 정교한 석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볼테라”라는 이름도 에르투리아 이름 Velathri를 로마식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단숨에 볼테라에 마음을 빼앗겼다. 작고 조용한 이 도시는 토스카나의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는 완벽한 위치에 있다. 바람 언덕을 올라 풍경 앞에 서니, 삶의 사소한 조급함쯤은 가볍게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 더욱 이 도시에 대한 느낌이 특별하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도시를 걸으면서 관광객을 거의 만나지 못한 덕에 마치 이 도시에 사적으로 받은 초대장을 들고 찾아온 기분이었다. 

메디치 광장이라니? 고풍스러운 도시 한복판에 낯익은 이름 Piazza dei Medici. 순간 이마를 찌푸렸다. 메디치? 피렌체도 아닌데? 이런 유서 깊은 에트루리아 도시와, 르네상스 금융 재벌이자 정치 브로커 가문인 메디치가 무슨 상관일까?

건물은 복사본처럼 똑같다. 여행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의심’이 아니라 ‘무지’다. 알고 보니 볼테라는 15세기 후반 그들의 야심 찬 확장 정책에 휘말려 피렌체군에 의해 강제 편입된 도시였다. 그 유명한 명반(알루미늄) 광산 덕에 욕심을 샀고, 결국 피렌체는 대포를 쏴가며 이곳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흔적처럼, 도심의 한 귀퉁이에 메디치의 이름을 덧칠해 놓았다. 피렌체에서 메디치는 위엄의 상징이었지만, 볼테라에서는 권력의 상처였다. 똑같은 이름이지만, 붙은 맥락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볼테라의 메디치 광장에 있는 건물은 피렌체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볼테라의 메디치 광장에 있는 건물은 피렌체와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궁전, 피렌체 느낌인데요?’ 하고 중얼거렸더니, 갤러리의 주인이자 조형 아티스트인 현지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디자인은 여기가 원조지요. 피렌체에서 본떠서 지었고 여기에도 같은 걸 지은 거예요.” 말하자면, 볼테라의 프리오리 궁전(Palazzo dei Priori)은 토스카나의 궁전 디자인에서 시조새 같은 존재였던 셈이다. 

광장 한편의 갤러리에서 알라바스트라 조각을 감상했다. 알라바스트라는 이 지역에서만 나는 반투명한 석재로, 햇빛에 따라 묘하게 색이 변한다. 어떤 건 하얗고 어떤 건 분홍빛을 띠었는데, 작가의 말로는 “수천 가지 색을 담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돌을 들여다보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 정말 다른 빛이다. 마치 내 안에 오래 잠들었던 감정들이 일시에 반짝이는 듯하다. 볼테라의 이 기이한 암석은 어쩌면 빛에 따라 마주한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 바깥으로 향하면 또 하나의 놀라운 유적이 기다린다. 로마식 원형극장이다. 1세기경,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건립된 이 극장은 최대 2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던 공연장이었다. 현재는 반쯤 땅에 묻혀 있지만 무대와 객석, 무대 배경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꽤 감동적이다. 그 옆엔 로마식 목욕탕 유적과 상수도 배관 유적까지 남아 있다. 볼테라는 말하자면 ‘작은 로마’ 아니 '로마의 로마'다. 다시 깨닫는다. 조용한 도시일수록 대단한 걸 숨기고 있는 법이라는 걸.

에르투리아 박물관에 소장된 조각상 /구글 이미지
에르투리아 박물관에 소장된 조각상 /구글 이미지

볼테라에서 가장 깊은 시간의 입구는 언덕 꼭대기의 박물관이다. 소박한 간판이 붙은 건물은 겉으론 별것 없어 보였지만 안으로 한 발만 디디면 ‘기원전 8세기’로 이동하는 포탈이다. Museo Etrusco Guarnacci, 즉 볼테라 국립 에트루리아 박물관. 이 조용한 고도시의 가장 고요한 보석이었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유골함(urns)들이 줄지어 나를 맞았다. 무려 수백 개였다. 에르투리안들은 무덤을 집처럼 꾸몄다.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보았기에 유골함들은 이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석재와 테라코타로 만든 이 작은 관들은 모두 누군가의 마지막 집이었다. 벽화로 일상과 사후세계를 그려 넣었다. 어떤 조각은 웃고 있었고, 어떤 건 심각하게 찡그리고 있었으며, 어떤 건 그냥 무표정한 얼굴로 천 년 넘는 시간을 사는 듯하다. 

그중 유독 눈을 사로잡는 조각 하나가 있다. 길쭉하고 마른 남자 형상의 청동 조각. 얼굴은 웃고 있었고, 몸은 실처럼 가늘었다. ‘L’Ombra della Sera’ — 저녁의 그림자. 이름부터가 시다. 이름 모를 에트루리아 청년이 석양 무렵 긴 그림자가 되어 걷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누군가 “이 조각 하나로 이탈리아 현대조각의 조상이 뿌리내렸다”고 했다는데 미술 문외한의 눈에도 곧바로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떠오른다. 그가 볼테라에 왔었고 분명히 여기서 영감을 받은 게 틀림없다. 나야 미술사 전문도 아니니 내 맘대로 이렇게 짐작해 본다. 잠시 이 조각과 눈을 맞추었다. 아마도 그는 천 년 전에도, 나 같은 여행자를 이렇게 쳐다보았을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들에는 설명이 적다. 에트루리아어로 적힌 석판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언어를 모르니까 있으나 마나라고 해야 하나? 학자들이 몇 개 단어는 해석해 냈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말하자면, 이 박물관은 말을 잃은 사람들의 세계였다. 그들의 일상, 신앙, 예술은 남아 있지만, 그 마음을 직접 설명해 줄 사람은 사라진 곳. 

볼테라는 이렇게 고요하게 오래된 문명을 품고 있다. 관광지답지 않은 점잖음, 유명해지려 하지 않는 자존심, 그리고 기억되는 것보다 상상하는 쪽에 가까운 도시. 그곳을 걷는 일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문명을 떠나보낸 도시를 걸으며 시간을 되짚어 상상하며 그려본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다시 메디치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나는 박물관에서 봤던 유골함 속 인물들이 이 거리 어딘가를 걸었던 시절을 상상한다. 그들이 남긴 도시는, 이제 내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날 밤 묵었던 산 지미냐노의 캠핑장은 말 그대로 자연주의라고 해야겠다. 캠핑장의 구획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 없이 자유롭게 자라고 있는 나무 옆에 대충 말뚝을 박아두었는데 어디까지가 내 구역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충 자리를 잡으라는 듯 정겹지만 엉성한 시스템은 불편하면서도 편안하다.

땅이 기울어 조금은 불편한 침상, 벌레 우는 소리마저 느껴지는 고요 속에는 오늘 깊이 마주한 수천 년의 침묵이 있었다. 그것이 어떤 것보다 나를 넉넉히 감쌌다. 에르투리안들은 하늘의 번개, 새의 비행 방향 등으로 신의 뜻을 읽는 하늘의 해석자들이었다고 한다. 로마의 점술 시스템은 에르투리아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니까. 그래선지 그날 밤 캠핑장에서 별을 바라보는데 사라진 언어를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는 여기 있었고 아직도 그대로 있어."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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