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꽃에 세를 내주는 마을, 바뇨레뇨
‘짜지 않게’를 주문한 파스타의 역설
불합리도 풍경이 되는 캠핑장의 밤

이탈리아 공중도시 바뇨레뇨 /사진=박재희
이탈리아 공중도시 바뇨레뇨 /사진=박재희

볼세나를 나설 때, 호수 위에 뜬 아침 햇살이 차창으로 미끄러졌다. 성곽과 성체가 손바닥만 한 인사처럼 남았고, 우리는 그 인사를 뒤로한 채 공중도시 Civita di Bagnoregio로 향했다. 이름만 들어도 그럴듯하지만, 오르비에토와 시에나를 거친 뒤라서인지 놀라움은 반쯤만 남았다.

그래도 마을 입구를 장식한 꽃들은 어찌나 화려한지, 카메라를 꺼내기도 전에 눈으로 몇 장을 찍었다. 붉은 제라늄, 노란 데이지, 이름 모를 보라색 꽃들. 마을 전체가 꽃에 파묻혀 있어서, 만약 꽃이 집세를 낸다면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부자 마을일 것이다.

바람이 절벽을 쓰다듬고, 비가 땅을 조금씩 깎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죽어가는 도시’라 부른다. 그러나 바뇨레뇨는 여전히 숨을 쉰다. 붉은 기와와 회색 석벽은 사라질 운명을 스스로의 장식처럼 두르고, 마치 소멸이 이곳의 고유한 풍경이라 말하는 듯하다.

멀리서 보이는 건 허공에 걸린 가느다란 다리뿐. 그 끝에는 옅은 안개 속에 앉은 과거가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람이 발밑을 스친다. 다리는 단순한 진입로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들어가는 좁고도 긴 통로다.

응회암 절벽 위에 자리한 마을은 땅이 허락한 마지막 요새처럼 서 있다. 화산이 남긴 재와 돌 위에 세워진 성벽과 골목, 작은 광장은 자연과 인간이 맞서면서도 묘하게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버티는 것이 곧 살아가는 일임을, 바뇨레뇨는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높은 곳에 마을을 짓는 게 방어의 기본이었다. 적이 오기 전에 지쳐 떨어져 나가도록, 높고 험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바뇨레뇨는 그 높이가 방어가 아니라 고립이 되었다. 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 있는 마을, 적 대신 관광객의 걸음을 늦추는 마을.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의 궁전 같다. 요즘은 사람도 마을도, 누군가의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고립에 들어선다.

마을을 떠나기 전,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판에는 8가지 파스타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지만 절반은 해독 불가였다. 주인아저씨가 “오늘의 파스타는 아주 특별해요”라고 권했지만, 속으로는 “특별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짜지 않게 해달라”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제는 “짜지 않게 해 주세요”를 이탈리아어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다. Non troppo salato, per favore. 주인이 웃으며 “OK!”하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잠시 뒤 나온 파스타는 토마토의 산미가 살아 있었지만 기대와 달랐다.

익숙하고 편안한 맛을 바랐는데 지나치게 담백했다. 간을 맞추려고 소금통을 달라고 하자, 아저씨가 눈을 꾹 감으며 “손님이 원하신 거잖아요”라고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주문한 건 ‘평범함’이었다는 걸. 여행지에서 평범함은 비싸고 귀하다.

로마로 향하는 길, 동선 위 숙소를 찾았다. ‘Hu’라는 캠핑 리조트가 눈에 띄었지만 이미 만실. 직원이 지도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며 “여기는 어때요?” 하고 소개한 곳이 ‘Fabulous Village’였다.

이름만큼 크고 넓었지만, 예약 방식이 특이했다. 텐트 한 면을 통째로 빌리는 규칙 때문에, 우리 셋은 세 면을 결제해야 했다. 자동차 캠핑 기준이라 한 면 넓이로도 백패킹용 텐트 세 동은 충분히 칠 수 있다. 그래도 무조건 텐트 하나에 한 면이라니 불합리하지만 어쩌겠나.

이왕 지불했으니 넓게 써볼까 했지만, 왔다 갔다 하기가 번거로워 한 면은 그냥 비워두고 자동차에 텐트 세 동을 널찍하게 배치해 두 면만 썼다. 거의 200유로. 영수증을 받아 들고 계산기를 두드려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미 선배가 아깝다며 다시 내려가 항의하자고 했고, 예상대로 결론은 “규칙은 규칙.” 여행 중 바가지도 풍경의 일부다.

그래도 시설 하나는 인정할 만했다. 아이 전용 샤워실, 작은 세면대, 맞춤 옷걸이까지, 어른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예뻐도 가끔은 귀찮고 성가실 때가 있다. 그 솔직한 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 진짜 부모의 자비다. 이곳은 그 자비를 설계로 도와줬다. 샤워실 문을 닫으면, 아이는 자기만의 왕국의 주인이 된다. “왜 이렇게 작아?”라고 묻는 아이에게 “네가 왕이라서”라고 답하는 장면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다음 날, 하루 더 묵고 싶었지만 토요일은 역시 만실. 아쉬움은 잠깐, 금세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미 지불한 값의 반절은 그냥 날려버리고 싶었다.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숙소 찾기는 어려워지겠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선택지가 생길 것이다. 실패는 종종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라는 경계가 생기면, 그 바깥을 상상하게 된다. 여행에서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볼세나에서 바뇨레뇨를 거쳐 로마로 가는 길 내내 ‘높은 곳의 운명’을 생각했다. 과거에는 방어를 위해 지어졌지만, 지금은 고요를 위해 유지된다. 연결이 당연한 시대에 필요한 건 속도의 조절이다. 다리를 건너야 닿는 마을에서 그 기술을 배운다.

여행 중에는 계산서 앞에서 약해진다.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으면 미묘한 갈등이 더 생긴다. 돈을 더 쓰기도, 아깝다고 하기도, 불편하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런 모든 낭비 같았던 순간들이 기억을 만든다.

내일 로마의 분주한 골목을 걸으며 오늘을 떠올릴 것이다. 공중에 떠 있는 도시로 향하는 다리, 온통 피어 있던 꽃, 너무나 귀했던 ‘평범한’ 파스타, 어이없는 규칙의 캠핑장 영수증과 아이 전용 샤워실까지. 캠핑장에서 너무 돈을 많이 썼다며 알뜰한 미 선배가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그 소리를 뒤로하고 혼자 속삭였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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