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영의 쉘위댄스] (80)
춤은 사람에 대한 이미지도 바꾼다
춤으로 재미도 보고 손해도 보았다
70년대 한창 젊은 시절, 이태원 해밀톤 호텔에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통행금지 시간 이전에 귀가하려면 10시쯤은 나이트클럽에서 나와야 하는데 우리는 밤샘을 목적으로 그 나이트클럽에 갔던 것이다.
밤새도록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젊음을 발산하고 새벽 4시에 나이트클럽을 나서니 몸도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마침, 맞은편 골목에 할머니가 하는 작은 해장국집이 있었다.
지난밤 열광적으로 춤추던 얘기를 하는 중에 할머니 표정을 보니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혀까지 찼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밤샘 투쟁을 한 것도 아니고 당시 사회 문제가 되던 대마초 피우다 적발된 연예인 취급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나갈 무렵 새벽 청소를 위하여 나선 청소부들이 들어왔다. 힘든 일이지만,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보니 우리가 낯이 뜨거워져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할머니는 우리가 장래도 기약 없는 막살아가는 젊은 청춘으로 본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동 건설에 모두 참여했고 보통 사람들처럼 중장년 시절까지 열심히 일한 세대였다. 밤샘 춤을 췄다고 해서 무조건 한심한 젊은 사람들로 본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나름대로 젊은 기운을 분출하기 위해 한때를 그렇게 보낸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

80년대 대기업 재직 때 서독에 출장한 일이 있다. 마침 회식이 있다고 하여 주재원 전 직원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식사를 마치고 술잔이 몇 순배 돈 후 노래자랑을 돌아가면서 했다. 주재원은 대기업에서도 엘리트 집단이다. 점잖은 자리였다. 남자든 여자든 노래했다 하면 고상한 성악이나 가곡을 불렀다.
맨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빗속의 여인’ 노래를 부르며 춤까지 췄다. 엄숙하고 고고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변하면서 환호도 나오고, 미묘한 상황이 되었다. 아주 좋았다는 반응도 있었으나, 품격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지적도 있을 것 같았다. 춤을 보는 시각은 일단 낮춰 본다. 그러나 부인들 반응은 대부분 좋았다. 덕분에 집마다 초대받기도 했다.
90년대 수백명을 관리하는 봉제공장 공장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원래 공장장은 근엄한 인상에 나이도 지긋한 사람들이 했는데 나는 당시 30대 중반이었다. 회사 창립 기념일을 맞아 외부에서 오락 전문 사회자를 초빙하여 한바탕 놀았다.
프로그램 중 ‘막춤 콘테스트’를 한다며 희망자들이 무대로 나와서 추게 했는데 내가 우승하며 ‘댄싱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사회자는 나도 생산사원 중 한 명인 줄 알았다고 했다. 소속과 하는 일을 말하라고 해서 ‘공장장’이라고 했는데 믿지 않으려 했다.
임원 중에는 체통을 지켜야 할 공장장이 마구 몸을 흔들며 생산사원들과 춤을 췄으니,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려고 그러느냐며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생산사원들은 그때부터 나를 격의 없이 대하며 금방 친해졌다. 그 덕분에 당시 공단을 휩쓸던 노사분규를 비껴갈 수 있었다.

공장장 근무 시절, 주문은 늘어나는데 3D 현상으로 작업자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외주생산업체를 찾으러 중국에 간 일이 있었다. 한 공장을 방문했는데 수백명의 생산사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식 접대가 대부분 그렇듯이 점심인데 그 독한 중국술을 권하는 바람에 많이 취했다.
놀랍게도 공장 안에 노래방 시설이 있었다. 단순히 노래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춤을 추기 위한 노래방이었다. 공간이 넓었다. 중국 사장이 젊은 여성 3명을 데리고 와서 마음에 드는 여성과 춤을 추라고 했는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막춤이 아니라 그들은 정식 춤을 추고 있었다.
못 춘다고 빼자 “차차차라도 추라”고 했다. 차차차도 정식 춤이니 배우지 않았으니 당연히 못 추고 망신만 당했다. 몇 년 후 댄스스포츠를 배운 후 다시 그 공장에 갔을 때 비로소 제대로 대우받았다. 그 후 비즈니스도 착착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춤을 보는 시각, 춤추는 사람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나라마다 다르다. 그것도 흑 아니면 백이다. 완전히 다를 정도로 극명한 차이가 있다. 춤 덕분에 좋았던 기억도 있고 씁쓸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재주다.
여성경제신문 강신영 댄스 칼럼니스트 ksy69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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