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영의 쉘위댄스] (78)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만의 모임

2000년대 들어 댄스동호회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태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한 동아문화센터와 중앙문화센터가 부부 볼룸댄스였다. 댄스동호회는 부부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우세하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부부 싱글 혼합형의 동호회가 생기더니 싱글들만의 댄스동호회도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혼이 아니더라도 혼자 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그즈음에 학교 교사들 중심인 교원댄스동호회, 사교댄스를 주로 추던 댄스동호회도 댄스스포츠 종목을 추가하면서 이 대열에 동참했다. 요즘은 의사 댄스동호회처럼 직업, 지역, 학원, 강사, 연령대, 부부, 장르별 댄스동호회가 많아졌다. 단독으로 댄스파티를 할 정도로 큰 동호회도 있고 연합으로 호텔 같은 장소를 빌려 댄스파티를 열기도 한다.

댄스동호회 활동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 모임이라 재미를 극대화하는 데 최적이다. /사진=강신영
댄스동호회 활동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 모임이라 재미를 극대화하는 데 최적이다. /사진=강신영

내가 기존의 큰 댄스동호회 두 군데 회장을 맡고 있었을 때 경기대 평생교육원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재학 중 영국 댄스 유학에서 돌아오자 우리들만의 댄스동호회를 만들자고 해서 내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로부터 5년간 회장을 맡으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댄스동호회 활동은 온라인 카페를 만들고 회원을 모집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우리 동호회의 초기 주축은 내가 몸담고 있던 경기대 코치아카데미 동기생들, 내가 활동하는 두 군데의 기존 댄스동호회 회원들이었다.

학원의 정해진 프로그램 안에서 댄스를 하는 것보다 우리가 주도하여 수준별, 종목별 댄스 활동을 하자는 취지였다. 기존 댄스 학원에서는 초급반 유지도 어렵다 보니 중급반 이상은 구성하기도 어려웠는데 우리는 이미 초급 수준을 충분히 거쳤으므로 중급반은 물론 고급반도 구성할 수 있었다.

우리 회원의 숫자가 우리 자산이었다. 이 자산으로 댄스 학원의 공간을 빌리고 우리가 섭외한 댄스 강사를 불러 우리가 원하는 종목과 수준의 댄스를 하는 것이다. 적당한 수준의 회비를 받아 공간 사용료, 강사료를 주고 나면 운영비가 남았다.

강습 별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으면 공간 사용료나 강사료에서 조정하고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축적된 운영비로 맞춰 나갔다. 한 반에 10명씩 잡아도 7~8개 반을 운영하면 어느 정도 수지가 맞아떨어졌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회원이 그 정도 되었다.

동호회가 좋은 것은 참여자가 모두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댄스에 대한 오해와 나쁜 선입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댄스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동호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같이 몰려다니며 강습이 끝나면 매번 뒤풀이가 있었다. 격렬한 댄스로 몸을 움직인 후이기 때문에 갈증도 나고 다 같이 생맥주를 마시며 나누는 대회는 즐겁기만 했다.

댄스동호회 활동은 같은 종목, 같은 루틴을 배운 사람들끼리라서 춤추고 어울리기 좋다. /사진=강신영
댄스동호회 활동은 같은 종목, 같은 루틴을 배운 사람들끼리라서 춤추고 어울리기 좋다. /사진=강신영

우리 동호회 주최 댄스파티나 MT도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북한강 강변에 자리 잡은 멋진 콘도를 빌려 낮에는 잔디밭에서 춤을 추고, 밤새 즐거운 춤을 추며 보낸 추억, 우리 인원에 딱 맞는 규모와 바닥에 마루를 깐 홀을 갖춘 장소를 섭외하여 밤이 새도록 발 아픈 줄 모르고 춤을 춘 추억들은 다시 해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이다.

방송에도 출연하고 우리 중에서 국민연금공단 광고모델로 뽑히기도 했다. 어딜 가나 춤을 췄고 다 같이 동일한 루틴으로 배웠으므로 체인징 파트너를 해 가며 춤을 출 수 있었다. 고정 파트너를 찾은 사람들은 프로 선수 커플도 나왔다.

내가 가장 이상적인 댄스동호회로 꿈꿨던 것은 남녀노소가 함께 어울리는 댄스동호회였다. 그러나 젊은 층은 자이브, 룸바, 차차차 같은 라틴댄스를 선호하고 나이 든 회원들은 왈츠, 탱고 등 모던댄스에 집중하다 보니 이들을 한데 어울리게 하기에는 여러 가지 애로 사항이 많았다. 종목뿐 아니라 세대가 같이 어울리자니 세대차도 나고, 기존 우리 회원들이 젊은 층을 기피하는 면도 있었다. 특히 나이 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경계했다.

동호회가 힘을 가지려면 회원 수가 많아야 하므로 다다익선 정책으로 회원을 모집했다. 특별히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은 걸러냈지만 문제 있는 사람들을 다 걸러내지 못해 사건·사고도 적지 않았다. 백인 백색의 다양한 사람들을 한 솥에서 같이 어울리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때가 전성기였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여성경제신문 강신영 댄스 칼럼니스트 ksy6922@hanmail.net

관련기사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