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의 건축 마실]
현상설계 공모의 그늘은 현재 진행형
88 올림픽 상징 조형물에 얽힌 사연

김중업의 평화의문과 김세중의 88올림픽타워 /그림=손웅익
김중업의 평화의문과 김세중의 88올림픽타워 /그림=손웅익

김남조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시인께서 좋아하신다는 슈크림 빵을 사 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시내로 나오다가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나폴레옹 제과점에 갔더니 슈크림빵은 조금 기다려야 나온다고 했다. 오전 약속 시간이 빠듯했기에 빵이 나오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동대입구역 근처 태극당으로 향했다. 마침 태극당에는 아침 일찍 나온 슈크림빵이 종류별로 죽 진열되어 있었다.

김세중미술관 실장과 함께 김남조 시인의 자택으로 들어갔는데 거실에서 10분 이상 기다려도 안방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한참 만에 휠체어를 타고 나오시면서 “당신이 내 애인인가? 여자는 화장도 하고 옷도 챙겨 입어야 하는데 불쑥 찾아오면 어쩌누” 하시며 웃으셨다. 그 때가 2022년 8월이었으니 시인께서 타계하시기 1년 전이다. 95세의 고령임에도 37년 전인 1985년 12월의 그 사건을 또렷이 기억하시고 열변을 토하셨다.

37년 전 그 해에 88올림픽을 앞두고 상징 조형물 현상 설계공모가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건축가와 조각가들이 참여했다. 그때 나는 모 건축사사무소에서 도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몸담고 있던 사무소에서 김남조 시인의 부군이셨던 김세중 조각가의 현상공모 제출 작품을 보조하고 있었다. 김세중 조각가의 스케치로 도면을 만들고 제안서와 모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나도 그 일에 보조로 참여하게 되어 조각가의 효창동 자택을 출입하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김남조 시인을 알게 되었다.

작품을 제출하고 심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날 김세중 조각가는 당신이 당선되는 것으로 확신하신 듯했다. 그러나 다음 날 신문에 발표된 당선작은 김중업 건축가의 ‘평화의 문’이었고 김세중 조각가의 작품이 2등이었다. 발표 전날 신문사에 보낼 당선 소감문까지 작성하셨으니 결과를 받아들이기 무척 힘드셨을 것이다. 그때가 1985년 12월이었다. 심사 과정에 부정이 개입했을 개연성이 많다고 확신하신 듯 조각가는 격앙되어 계셨다. 그 일로 인해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급격히 무너진 김세중 조각가는 이듬해 6월에 타계하셨다. 향년 57세였다.

김세중 작 이순신 장군 흉상 /그림=손웅익
김세중 작 이순신 장군 흉상 /그림=손웅익

내가 슈크림 빵을 들고 간 그날, 김남조 시인은 37년 전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나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신 것이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또렷했고, 그 안에 울분이 가득했다. “맛이 좋네요” 하시며 슈크림 빵 한 개를 다 드신 후 책 몇 권에 사인을 해주셨다. 그날이 시인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88 올림픽 상징 조형물의 후일담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김중업 건축가는 현상설계 공모에 당선된 후 실시설계 과정에서 상당한 고통을 겪은 것으로 짐작이 간다. 당선된 조형물의 높이를 높여라, 줄여라 하는 발주처 공무원들이 황당한 요구에 저항하고 시달리던 건축가는 결국 올림픽 개회식을 못 보고 1988년 5월, 향년 66세로 타계하셨다. 생전에 그 조형물은 당신 작품이 아니라고 한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올림픽 공원을 지날 때면 평화의 문을 바라본다. 누군가 ‘건축은 실체를 남기므로 보람이 있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실체가 그리 내세울 만하지 못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림은 다시 그릴 수 있고 악보도 수정 가능하지만 건축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건축가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든 예술 작품이 그렇겠지만, 젊은 시절 작품과 나이 들어 더 완숙해진 후 작품은 차이가 크다. 특히 건축은 더 하다. 생각도 깊어지고, 경험이 쌓여 시야도 더 넓어지면서 작품이 달라진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가 설계한 수많은 실체가 전국에 남아있다. 많은 경우 내 작품이라고 소개하기에 곤란하다. 때로는 그 앞을 지나기에 부끄러워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지난 시절의 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신중하지 못함, 더 고뇌하지 못함, 더 창의적이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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