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의 건축 마실]
구간마다 특별한 경관의 한양도성 길
그중 매월 두세 번은 찾는 낙산도성 길
튀지 않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그런 길

한양도성 길은 구간마다 각기 특별한 경관을 가지고 있다. 우선 남산구간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아주 외향적이고 멋을 잘 내는 사람 같다. 한강과 강남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울 중심부 고층빌딩이 발아래 펼쳐진다. 남산구간 길은 잘 가꾸어진 울창한 숲길이고 경사도 편안하다. 친근하고 사교성 좋은 사람 같은 남산구간엔 사계절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인왕산구간은 거대한 바위산에 도성을 만들었다. 도성 길을 따라 이어지는 민둥 바위에 새겨진 깊은 주름은 세상사 다 내려놓은 노인의 주름살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그런지 인왕산구간 바위에서 멀리 인천 방향으로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애잔한 슬픔을 담고 있다. 인왕산구간의 동쪽 끝 지점에 창의문이 있고 그 맞은편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으니 인왕산구간을 걸으면 내내 마음이 애잔해진다.
백악구간은 서울의 북쪽 북악산 능선을 따라 조성된 도성길이다. 북악산 바로 아래쪽에 청와대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열 살 때인 1968년 1월 21일 새벽에 청와대를 목표로 북에서 내려온 31명의 무장 공비와 이곳에서 경찰이 총격전을 벌였던 현장이다.
험한 지점이 많아 낙상의 위험도 항상 도사리고 있다. 비 오는 날이나 겨울엔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몇 년 전 백악구간을 아내와 같이 넘었는데, 다시는 이 구간을 가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백악구간은 한 번 만나고 나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성격이 거칠고 모난 사람을 연상시킨다.
낙산 도성 길은 흥인지문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짧은 구간이다. 낙산은 산이라기엔 좀 낮고 언덕이라기엔 제법 높다. 있는 듯 없는 듯해서 대학로를 자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으면 낙산의 존재를 잘 모른다.
산이 작아서 낙산이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그러나 낙산 도성 길을 가보면 그 이유를 한눈에 알 수 있다. 크게 휘어진 성곽은 거대한 용이 몸을 힘차게 틀어 올리는 형상이다. 정상에 올라 용의 등에 타고 한 바퀴 돌면 서울의 동서남북을 다 볼 수 있다.
낙산이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는 용의 형상이라 서편으로는 서울 시내 고층빌딩과 주작 남산, 백호 인왕산, 현무에 해당하는 북악산이 보이고 동편으로는 서울 외곽의 거대한 아파트 숲과 북한산, 수락산, 아차산이 보인다.
낙산 도성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흥인지문에서 바로 올라갈 수도 있고, 창신동 골목으로 오르다가 중간중간 골목에 난 계단을 오르면 낙산 도성 길로 연결된다. 대학로에서는 이화동 마을 여러 골목으로 오를 수 있다. 삼선교 방향에서 오르는 길도 많다.
나는 한 달에 두세 번 낙산 도성 길을 걷는다. 20년이 넘었으니 최소 200번도 넘게 이 길을 걸었다. 마음이 헛헛할 때도 걸었고, 불안할 때도 걸었다. 그러나 대부분 그냥 이 길이 좋아서 걷는다.
비바람이 치는 날도, 눈이 쌓이는 날도 걷는다. 한여름 날 온몸이 흠뻑 젖으며 오르면 젊어지는 것 같고, 낙엽이 쌓여가는 가을엔 침묵이 좋아 걷는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걷기도 하고 저녁노을을 보러 오르기도 한다.
평소 조용하고 별로 튀지 않는 사람이라 별로 주목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여러모로 대단히 존경할 만한 사람인 경우가 있다. 낙산 도성 길이 그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