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의 성과 인권]
인권· 교권은 사회 발달 따른 발명품
기존 학교를 뛰어넘는 새로운 학교
더 나은 배움의 공동체를 발명하자

사진은 지난 7월 19일 오전 전남 영광군 중앙초등학교 한 교실에서 여름 방학식이 열리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연합뉴스
사진은 지난 7월 19일 오전 전남 영광군 중앙초등학교 한 교실에서 여름 방학식이 열리고 있는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연합뉴스

교권과 학생 인권은 각자 영역을 넓히는 땅따먹기가 아닙니다.

‘인권’ ‘존엄성’ ‘권리’ 이런 개념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원래 있는 것을 인간이 찾아낸 걸까요? 아니면 에디슨의 발명품처럼 없었던 것을 발명한 것인가요? 에디슨의 전기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환하게 하듯이 인간들이 같이 잘 살기 위해 사회적으로 합의된 ‘인권’은 더 많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불과 200년 전에는 양반이나 백인이 노예를 소유하고 사고파는 일은 죄책감을 일으키는 일이 아닌 당연한 그들의 권리였고, 남자가 부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만고의 진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서로 간의 더 큰 이익을 위해 합의된 새로운 약속을 발명해 나갑니다. 모든 사람의 ‘인권’을 주장하고, 나아가 ‘학생 인권’ ‘아동 인권’ ‘교권’ 등 약자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거듭거듭 발전해 가고 확장해 나가는 한 지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인간들이 만든 사회적 약속인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년 전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저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충격적인 한 장면을 경험합니다. 3학년 교실에서 인권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 찰나, 한 남성이 교실 앞문을 박차고 들어오더니 내 옆에 서 있던 담임교사를 향해 “너가 OO이 담임이지?”라고 소리를 지르면 교사의 뺨을 내리쳤습니다. 교실의 모든 학생은 소리를 질렀고, 몇몇 학생은 울기도 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폭력의 현장에 교사도 나도 학생도 모두 얼음이 돼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선생님은 몇 달간 병가를 냈고 다시 복직한 후에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평생 큰 상처를 남겼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이유로 딸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생님을 폭행하는 부모. 아버지는 그 방식이 내 아이를 사랑하고 잘 지켜주는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이 삐뚤어진 교육방식으로 자란 15년 전 아이는 지금 성인이 돼 부모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 부모로 기억할까요? 소중한 내 아이에게는 조금의 손해도 용납되지 않고, 내 아이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교사조차도 무조건 응징할 준비가 돼 있는 무모한 부모들 앞에서 교사의 존엄한 노동은 가차 없이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왜 이렇게 점점 교사를 괴롭히는 것일까요? 끝없는 경쟁 속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도록 요구하는 이 사회의 현실이 더 많은 부모를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은 앞의 여러 현실과 함께 교사들이 현장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고충이 있음을 극명히 보여주는 맘 아픈 사건이었습니다.

교사가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들과 신뢰 관계를 맺으며 안전하고 행복한 노동자로서의 역량과 교사로서 소신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좋은 노동환경이 꼭 학생의 인권이 낮아져야 하는 것인가요? 학교에서 학생의 인권이 지켜지는 것이 교사의 권리를 짓밟고 교사의 인간다운 삶을 방해한다는 것이라는 일부 주장들에 대해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합니다.

1989년에 만들어진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에 대해 대한민국은 1991년에 비준했고, 그 내용을 충실히 따르기로 약속한 국가입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이 국제법을 따르면서 자국의 아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변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안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의 내용이 보다 더 잘 이행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교권에 힘을 보태기 위해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학생의 인권이 존중되는 것은 교사의 권력을 짓밟고 지켜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교사의 권리가 잘 지켜지는 것도 학생의 인권을 짓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은 학생으로서 더 존중받고, 교사는 교사로서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할까? 어떻게 더 나은 배움의 공동체를 발명할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한쪽의 인권이 과해서 이런 사태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시각은 너무 근시안적인 대안 방식일 것입니다.

개들이 오줌도 누고 똥도 누고 싶어 하는 풀밭은 세상에서 가장 푸르고 보드랍고 촉촉한 풀밭이었어요. 토끼들은 그 풀밭에서 깡충깡충 뛰고, 낮잠을 즐겼어요. 풀밭의 풀은 맛도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토끼는 푸른 풀밭을 독차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쫓아낼 방법을 생각해 내지요. 개보다 더 무서운 이빨을 만들어 붙이고 개를 위협했습니다. 토끼는 그렇게 개를 쫓아내고 풀밭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해졌어요. 풀이 전처럼 푸르지도 않고, 풀 맛도 없고, 보드랍지도 않았어요. 토끼는 다시 개들과 사이좋은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개가 오줌도 누고 똥도 누고 하니 다시 세상에 가장 푸르고 보드라운 풀밭이 됐어요.

-<풀밭 뺏기 전쟁> 중에서-

그림책에서 토끼와 개는 풀밭을 놓고 전쟁을 치릅니다. 그러나 멋진 풀밭은 서로를 인정할 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겐 새로운 상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영역을 넓히는 토끼의 해결 방식이 아니어야 합니다. 기존의 상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학교를 만들겠다는 방향성을 같이 가질 때 교사도, 학생도 모두의 인권이 지켜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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