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의 성과 인권]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희망을 찾다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

생활고로 인한 사망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이와 관련해 극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결국에는 자유를 얻는 한 무기수의 이야기, 영화『쇼생크 탈출』에서 ‘희망’을 되뇌어 보고자 한다. 영화 속에서 대비되는 세 인물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펴본다.

(왼쪽부터)영화 '쇼생크 탈출'의 앤디(팀 로빈스),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 레드(모건 프리먼) /영화 화면 캡처

앤디 듀프레인. 아내와 그녀의 애인을 살인했다는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아 중범죄들만 모여 있는 쇼생크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쇼생크 교도소는 강간, 폭력 등 잔인함과 파렴치가 뒤섞인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앤디는 부당함 속에서 인간성을 지켜나가며 자유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한다.

두 번째 인물은 앤디가 쇼생크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교도소에서 수십 년간 복역 중인 죄수 레드다. 이미 교도소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레드는 교도소에서 필요한 물품을 몰래 들여와 판매하는 만물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인물은 50년간 교도소 생활에 완전하게 길들여진 브룩스다. 감옥에서 나간다 해도 어디든 갈 곳이 없다. 가석방돼도 교도소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난동을 부리기까지 한다. 드디어 가석방됐지만 쇼생크 교도소를 그리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의 자유는 새장 안의 자유로 길들여진 것이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 2016년 재개봉 당시 포스터 /위키나무

범죄자가 나오는 많은 영화에서처럼 이 영화에서도 재소자들은 최소한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 때려서 죽고, 총으로 쏴 죽이고, 강간이 벌어지고, 폭력이 난무해도 모두 용인되는 곳이다. 도저히 인간다움을 찾을 수 없는 그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자유와 존엄을 지켜내려는 앤디의 모습이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앤디는 이렇게 최소한의 인간으로 자존심을 지켜나간다. 교도관의 세금을 관리해 주고 대신 동료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마시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고된 노동 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재소자들은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이때 앤디는 마치 자신이 평범했던 은행원으로 돌아간 듯한 표정으로 동료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앤디는 기증받은 물품 속에서 LP판을 발견하고 몰래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교도소의 스피커에서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흘러나온다. 하늘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아름다운 선율에 앤디와 죄수들은 모두 최면에 걸린 듯한 표정으로 부동의 자세가 되어 음악이 주는 황홀함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과 행복을 경험한 것이었다. 감전된 듯 서 있는 죄수들의 장면이 감동인 이유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그것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죄수든, 교도관이든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희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캄캄한 교도소에서 19년의 생활을 이어간다. 교도소장의 비자금,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증인의 죽음, 반복되는 몇 개월씩의 독방 생활, 더 수척해진 얼굴과 흰머리···. 친구 레드는 앤디의 희망을 헛소리라고 이야기하면서 불안하게 바라본다.

희망? 희망은 위험한 거야. 희망은 사람을 미치게 하지. 이 안에선 아무 쓸모도 없어. 희망을 갖지 않는 편이 나아.

교도소의 스피커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흘러나오자 앤디와 죄수들은 모두 최면에 걸린 듯한 표정으로 부동의 자세가 되어 음악이 주는 황홀함에 흠뻑 젖어들었다. /영화 화면 캡처

『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의 앤디, 레드, 브룩스의 삶은 어쩌면 우리의 삶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아무 이유 없이 자유로움을 박탈당하는 상황은 비단 교도소 안에서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고를 겪던 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안타까운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터지자 너나없이 복지 사각지대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최근까지도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폐 끼쳐서 죄송'이라는 쪽지를 남긴 모녀의 삶은 어땠을까? 어찌 보면 그들 또한 교도소의 거대한 벽과 같이 사회의 거대한 벽에 갇혀 절망을 반복하다 보니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게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계속되는 절망의 벽에 갇힌 사람들이 자유를 선택할 용기를 갖는 것은 브룩스가 희망을 찾지 못한 것처럼 쉽지 않다.

처음에는 저 벽을 원망하지. 하지만 시간이 가면 저 벽에 기대게 되고 나중에는 의지하게 되지. 그러다 결국엔 삶의 일부가 돼버리는 거야.

희망은 언제 가질 수 있을까? 앤디는 20년 동안 밤에 벽을 뚫었다. 그것이 앤디가 살아가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영화 화면 캡처

희망은 언제 가질 수 있을까? 앤디는 20년 동안 밤에 벽을 뚫었다. 그것이 앤디가 살아가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반면에 50년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고 나온 브룩스는 “나 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라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레드는 가석방 후 브룩스와 똑같은 두려움을 경험하지만 친구 ’앤디와의 약속‘이란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친구가 던진 약속을 믿고 두려움을 떨치고 희망과 자유를 선택한다. 그리고 드디어 멕시코 자유의 땅에서 그들은 재회한다. 

생활고 때문에 삶을 마감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우리는 좌절이 아닌 희망을 주었어야 했다. 무엇을 어떻게 주었어야 했을까? 그러면 국가는 어떻게 이들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의 싹을 주어 국가의 책무를 다할 수 있을까?

기억해요, 레드. 희망은 좋은 거예요. 가장 소중한 것이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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