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가는 여행에서
추억을 나누고 쌓는 여행으로의 변화

모든 인도인이 생의 마무리를 하고 싶어 하는 곳 바라나시 갠지스강. 기안84의 TV 속 여행을 보며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을 떠올렸다.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인도인이 생의 마무리를 하고 싶어 하는 곳 바라나시 갠지스강. 기안84의 TV 속 여행을 보며 그곳에 머물렀던 시간을 떠올렸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갈 때는 다 똑같네요.” 갠지스강 화장터에 놓인 유해들을 바라보며 기안84가 조용히 말을 건넨다. 시즌2를 시작한 MBC의 여행 예능프로그램 <태어난 김에 세계여행>에서 향한 곳은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이라 불리는 바라나시다.

주저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하는 기안84의 여행이 흥미로워 시청한 것도 있지만, 바라나시를 화면으로라도 다시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나 역시 인도에서 보낸 시간 중 바라나시가 큰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이십 년 전, 회사에서 받은 안식월 한 달을 꽉 채워 인도에 머물렀다. 델리(Delhi)에서 출발해 아그라(Agra), 바라나시(Varanasi), 부다가야(Bodh-Gaya), 리시케시(Rishikesh) 등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곳을 찾아 다니며 여행했다.

죽은 아내를 그리며 지은 타지마할에서 사랑의 힘을 느끼고, 석가모니가 성불했다는 보리수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며칠을 보내고, 비틀스의 멤버들처럼 요가와 명상을 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인도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갠지즈강 강가 인도인의 모습과 표정이다.

인도 문명의 발원지이자 어머니의 강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만난 인도인들은 죄를 씻어내듯 몸을 닦고, 소원을 빌며 꽃등을 띄우고, 죽으면 이 강에서 재가 되어 돌아가고 싶어 한다.

삶과 죽음, 희망과 슬픔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바라나시의 사람들은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육체적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열두 서너 살 된 아이가 ‘그게 사는 거야(That’s the Life!)‘란 말을 자연스럽게 꺼내고, 족히 환갑은 지났을 법한 할아버지 눈매에는 장난기 어린 웃음이 가득하다.

좁은 골목길에는 노란색 꽃으로 장식한 시신을 메고 가는 행렬이 종소리와 함께 이어지고, 화장터의 연기 사이로 무리 지어서 모여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거기서 강을 따라 조금만 걸어 내려오면 빨래하고 목욕하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강가가 어둑해질 무렵이면 뿔피리 소리와 함께 사제들이 등장하고 시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아르티 푸자(Arti Puja)가 시작된다.

나에게 인도는 이 모든 것이 뭉뚱그려진 장면이다. 불편함과 불안감 속에서 만나게 되는 현지의 삶이 그 어떤 여행지보다 극대화되어 남아 있는 곳, 그래서인지 오히려 나를 더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곳이다. 

땅끝마을 해남에 위치한 미황사. 의 주인공 박하경처럼 나 역시 이곳에서 먼바다를 바라봤다. /게티이미지뱅크
땅끝마을 해남에 위치한 미황사. 의 주인공 박하경처럼 나 역시 이곳에서 먼바다를 바라봤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실 젊은 시절 내가 여행을 나섰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생경함 속에 나를 데려다 놓고 다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 말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에는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직장도 가족도 버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잊은 채 여행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둔주, 보행성 자동증, 방랑벽 등으로 불린 이 증세는 마치 유행병처럼 온 유럽에 번졌고 정신없이 길을 떠난 이들은 미치광이 여행자로 불렸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치광이 여행자’란 단어를 되짚으며 시작한 <박하경 여행기>의 주인공 국어 교사 박하경은 일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걷고 먹고 멍때리는 게’ 전부인 하루 여행을 떠난다. 둔주(遁走,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여기저기를 배회함)까지는 아니지만 20대와 30대의 나 역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느꼈던 갈등과 불안,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숨구멍을 뚫어주는 루틴처럼 말이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의 여행은 달라졌다. 혼자 오롯이 감각하는 여행보다는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좋은 풍광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경험하고 특별한 추억을 쌓는 시간을 선호한다. 숨을 쉴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자연스레 익혔을 수도 있고, 어쩌면 마음이 더 단단해져(무뎌져) 이전보다 숨구멍이 덜 필요해졌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행지를 다룬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는 건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처럼 마음먹었다고 쉽게 가방을 쌀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움직이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으니 말이다. 떠나는 목적은 달라졌지만 무엇이든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발을 뗀다는 건 두근거리는 일임이 틀림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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