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산책은 번잡한 일상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몸의 자연스런 움직임에 호흡을 맡기는 시간
토요일 오후, 주말이지만 회사 행사가 있어 사무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다른 날과 달리 하늘빛이 유난히 맑았다. 나무가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로 바람이 불어서인지 미세먼지까지 날아가 버린 듯했다. 운전 중인 차의 창문을 끝까지 내리고 한동안 달리다 이 좋은 바람을 두고 그냥 집 안에 앉아있을 수 없다 싶었다.
집에 도착한 후 남편에게 함께 산책 나가겠냐고 물었는데 머뭇거리는 모습이 내키지 않아 보였다. 기다리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과 운동화로 환복한 후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오후 5시쯤이었으니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 될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주변이 밝을 때 흔들리는 나무들을 더 보고 싶었다.
보통 남편과 산책을 나서면 한강을 끼고 옥수동 쪽으로 가거나 용비교를 지나 서울숲으로 아니면 집 뒤 응봉산 너머 금호동 쪽으로 가는데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향했다. 자주 걷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말 오후 아직은 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금남시장을 거쳐 시장 뒷길로 들어섰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골목길을 한동안 걷다 보니 무성한 나무들이 보이는 금남 근린공원이 나타났다. 집 근처가 아니라 차로 지나갈 때만 힐끔 바라보던 곳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나무 넝쿨이 뻗어있는 산책로 양옆으로는 장미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하마터면 장미가 피는 계절인지도 잊은 채 여름을 맞을 뻔했다. 탁구 교실이 열리는 오래된 체육시설도 보였다. 오르막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조금 걸으니 크지 않은 원형의 공원이 나타났다.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공원 전망대 벤치에 앉았다.
빠르게 걸어와서인지 들숨과 날숨이 생생히 느껴졌다. 혼자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주변 공기와 나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동행이 있으면 아무래도 보폭을 맞추고 대화하며 목적에 맞는 루트를 정했을 거다. 혼자 걷는다는 건 나에게만 집중하며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길을 정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우리 딸 만한 나이였을 때는 목적 없이 내키는 대로 골목길을 쏘다니며 많이 걸었었다. 낯선 동네 낯선 공기가 오히려 나를 오롯이 느끼게 해 준다는 게 즐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걷는다는 것이 목표 지점이 있거나, 시간 안에 가야 하거나,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돼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말 그대로의 산책을 한 것 같았다.
제대로 한번 걸어봐야겠다 싶을 땐 걷기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책들을 펼쳐본다. 프랑스의 철학자 로제 폴 드르와는 <걷기, 철학자의 생각법>(책세상)에서 ‘앉거나 서서, 지하철에서 비행기로, 기차에서 자동차로 실려 다니는 우리는 이따금 걷기에 오롯이 전념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오래 걸을수록 걷기는 우리를 사로잡고, 점령하고, 우리의 몸짓과 호흡 리듬, 심장 박동을 바꿔 놓는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까지 다르게 형성한다. 우리가 몰두하고 전념하는 중심 활동이 되면서 걷기는 생각에 연이은 변화와 새로운 자극을 가져오고, 그것이 특별한 제약처럼 작용해 생각의 흐름을 바꿔 놓는다.
오랜 걷기로의 복귀는 우리를 자연 속으로, 몸의 느린 전진 속으로, 근육과 호흡의 지구력 속으로 끌어들인다. 또 이런 걷기는 우리를 다시 풍경 속으로 돌려보내 높낮이와 거리, 땅을 의식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오랜 리듬, 심오하고 우주적인 리듬을 되찾게 하고 이동의 피로를 느끼게 하며 어느 고개, 어느 산봉우리를 돌아설 때 문득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보상으로 돌려준다.“
작가의 걷기에 대한 예찬을 읽다 보면 서로 다른 다리를 번갈아 내딛는 이 행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당장이라도 운동화 끈을 조이게 된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문학동네)을 쓴 루소는 걷기의 의미에 대해 말할 때 늘 언급되는 철학자다. 그는 걷는 행위를 고독과 명상의 시간으로 칭하며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이 되어 마음이 흐트러지거나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자연이 바랐던 상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하루 중 유일한 시간’이라고까지 추앙한다.
세상과 나를 발견하는 기회를 걷기로 가질 수 있다는 걸 새삼스레 다시 느껴본 그날 이후 나 역시 시간만 허락되면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걷고 있다. 특별한 약속이 없었던 오늘 점심시간에도 몸이 향하는 대로 사무실을 나섰다. 을지로 조명거리를 거쳐 중부시장으로, 방산시장으로, 청계천으로 크게 한 바퀴를 빠르게 돌았다.
등에 배인 땀만큼 나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하나로 완결되는, 닫혔던 생각의 문을 여는 걷기에 한동안 빠져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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