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의 심리학

며칠 전에 고향에 계신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셨다. 며칠 입원하여 응급처치를 받으신 엄마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후유증을 예방하기 위해 정밀검진을 받기로 했다. 일단 아버지와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의 큰 병원으로 먼저 올라가셨다.
나는 문병을 왔던 가족들과 함께 자가용으로 뒤를 따랐다. 내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섬진강 최하류에 위치해 있다. 나의 서울행은 하동읍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악양면 평사리 가는 길, 화개 쌍계사 가는 길, 구례 화엄사 가는 길을 따라 순조로웠다. 국도가 끝나고 순천 완주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여정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예년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고향 인근 고장에서는 이맘때면 화개벚꽃 축제, 광양 매화축제, 구례 산수유 축제들이 앞다퉈 열리고, 꽃구경을 하며 새봄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도로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평소 한 시간이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축제 시즌에는 서너 시간 걸려도 몇 발짝 나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올해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인적을 찾기조차 힘들다.
엄마가 쓰러지시지만 않았다면 우리 가족 역시 꽃 축제를 즐기는 상춘객의 대열에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차를 몰고 가면서 곁눈질로 힐끔힐끔 도로변과 강변, 가까운 야산에 활짝 핀 벚꽃과 매화꽃과 산수유꽃을 볼 수밖에 없었다. 눈이 어질어질해 질 정도로 황홀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꽃들은 수줍은 조선조의 새색시처럼 다소곳하지 않았다. 대담한 현대여성처럼 저마다 자신의 멋진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엄마 때문에 울적해진 마음을 다소나마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이상화(1901-1943) 시인이 일제강점기인 1926년 ‘개벽’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떠올랐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은 삼천리금수강산에 꽃이 피고 새 봄이 왔지만, 봄이 와도 봄을 제대로 즐길 수도 없고 즐길 마음조차 죄스러운 나라 잃은 망국민의 비애를 직정(直情)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나는 섬진강변의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보면서 갑자기 왜 이 시를 떠올렸을까.
외적으로는 온 나라가 코로나 때문에 봄을 빼앗긴 상태이고, 내적으로는 엄마의 병환 때문에 심란한 상황에서, 그러니까 ‘내 마음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지만, 그럼에도 꽃을 보며 잠시 넋을 잃은 것이 엄마에게 미안했던 내 속내가 이상화 시인의 이 시를 연상시켰지 싶다.
꽃이 피는 것은 봄이 오는 신호다. 아무리 엄동설한의 추위가 이전의 기세를 몰아 꽃피는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로 맞서보려고 해도 기어이 봄은 오고야만다.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올라오는 새싹과 딱딱하게 말라붙은 앙상한 가지에서 핀 꽃봉오리는 경탄을 자아낸다.
스크류 드라이버로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을 때, 나사못은 두꺼운 벽을 그냥 직진만 하는 것[直]으로는 제대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 360도로 빙글빙글 돌면서[曲]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꽁꽁 얼어붙은 땅을 뚫고 올라와 싹이 터고 꽃이 피며 봄이 오는 모습을 ‘곡직(曲直)’의 기세라고 표현한다.
‘불문곡직(不問曲直)’이란 말만 해도 그렇다. 세상일에는 곧은 것, 옳은 것[直]과 굽은 것, 그른 것[曲] 엄연히 존재한다. 곡직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할 수는 없다. 불문곡직하고 그러니까 다짜고짜 앞으로만 위로만 직상할 수는 없다. 빙글빙글 돌면서 나아가면 더 힘차게 더 오래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화 시인이나 나처럼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도 사실은 오랑캐 나라로 강제로 끌려가 정략결혼을 한 전한시대 최고의 미인 등소군의 마음을 후대에 당나라의 한 시인이 대신 노래해 주는 시이다.
그런데 ‘춘래불사춘’이란 말은 알아도 그 시구의 바로 위 구절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역하면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도 없네’라는 뜻이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어찌 북쪽 오랑캐 땅이라고 해서 풀도 없고 꽃도 없으랴만’ 으로 의역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낯선 땅에 끌려가 억지결혼을 하는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처지에서는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다는 서러운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화 시인처럼 나라를 잃었거나, 등소군처럼 낯선 나라로 끌려왔거나, 나처럼 엄마가 쓰러져서 슬픈 현실은 저마다 다르지만, 제각각 빼앗긴 들에 꽃이 피고 봄이 왔건만, 봄이 봄 같지 않은 마음은 매 한가지인 것이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왜 꽃을 좋아할까? 미국 뉴저지 럿거스 주립대 심리학과 지넷 해빌랜드-존스 교수팀에 따르면 사람들은 남녀노소 동서양 할 것 없이 꽃다발을 선물로 받으면 기쁨으로 눈이 동그래지고,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런 미소를 심리학자들은 ‘듀센 미소’라고 한다. 1800년대에 프랑스의 심리학자 듀센이 만든 용어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사람들에게는 인위적으로는 절대로 지을 수 없는 자연스런 미소가 있다. 입술 근육과 함께 눈가의 근육이 함께 움직이는데, 진짜로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을 때는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원시시대 우리 조상들이 사바나 초원에 살면서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절의 기억을 들먹인다. 그 시절에는 꽃은 곧장 식량을 연상시켰다는 것이다. 꽃이 진 자리에는 채집의 대상인 열매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 좋은 기억이 꽃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더구나 꽃은 그 자체로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강력한 자극(super stimuli)’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수컷 공작새의 화려한 깃털 춤을 보고 황홀해지는 암컷 공작새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암컷 공작은 길고 숱이 많으며 화려한 꼬리를 가진 수컷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그것이 수컷의 유전적 건강을 상징하는 지표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꼬리가 짧고 숱이 적은 수컷은 바닥에 떨어진 다른 수컷의 깃털을 가져와 자신의 깃털인 것처럼 치장을 할까.
공작새의 암수는 둘 다 자신들이 왜 꽃처럼 화려한 꼬리털에 집착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영장류는 특별히 학습을 받지 않았는데도 뱀처럼 미끈한 피부에 길게 생긴 파충류에 본능적으로 거부와 공포의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파충류처럼 생긴 물체는 피하고 보는 것이 원시시대 이래 우리의 생존에 유리했을 것이므로 ‘뱀=독’이라는 등식이 생겨났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꽃은 열매를 제공해줘서 친하고 보는 것이 우리 생존에 유리했기에 ‘꽃=식량’이라는 등식이 우리 인류의 마음속에 서서히 유전자처럼 새겨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코로나 시국이 이어지면서 마음이 울적하고 심사가 어지러운 분이 많을 것이다. 이상화 시인처럼 나라를 잃지 않았어도, 코로나로 소중한 가족을 잃었거나 바이러스와 처절하게 생존의 투쟁을 벌이는 분들과 그 가족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처럼 연로하신 부모님이 일시적으로 쓰러진 것은 비할 데 없이 미미한 불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정도만 다를 뿐이지 내 마음속의 들을 빼앗긴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미 봄은 왔지만 봄이 온 것 같지 않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고 묻는 그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마음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호승, <꽃>, 전문
하동 출신의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코로나로 혹은 또 다른 개인적인 일로 마음의 들판을 빼앗긴 분들에게 이 시를 권한다. 시인의 말처럼 부디 마음속에 박힌 못을, 마음속에 박힌 말뚝을 뽑고 그 자리에 꽃을 심는 치유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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