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으로 떠난 작가 이윤기와 추억의 심리학

화창한 봄 날씨를 보인 지난 12일 대전시 서구 한밭수목원을 찾은 시민이 활짝 핀 서부해당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연합뉴스
화창한 봄 날씨를 보인 지난 12일 대전시 서구 한밭수목원을 찾은 시민이 활짝 핀 서부해당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연합뉴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우연히 듣게 된 최백호의 ‘봄날은 간다’. 장사익도 잘 부르지만 최백호도 잘 부른다. 노래를 듣노라니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로 유명한 작가 이윤기 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의 노래를 부르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내가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부르면 되지 않겠는가. 삶 또한 그렇다. 삶의 고수들이 도처에 수두룩하다. 그들의 삶 앞에 보면 나의 삶은 늘 초라하게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살지 말아야 하는가? 늘 주눅 들어 있어야 하는가? 그럴 것 없다는 것. ‘나’ 의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알기로 '봄날은 간다'에는 몇 가지 장르의 여러 버전이 있다. 오리지널이 백설희 여사가 1954년에 부른 가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딸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가히 국민가요 수준이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후배 가수들이 계속 리메이크하고 있다. 최백호, 한영애에서 장사익까지 버전마다 각기 개성이 뚜렷하다. 최근 미스 트롯의 홍자와 미스터 트롯의 장민호가 부른 버전도 있다.

다음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든 허진호 감독이 2001년 만든 영화 ‘봄날은 간다’가 있다. 유지태와 이영애가 주연했다. 이 영화의 동명의 주제가는 김윤아가 불렀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윤문식, 최주봉, 김자옥이 주연한 뮤지컬 ‘봄날은 간다’(2014)도 있다.
한국 춤의 원로 김매자의 춤인생 60년 기념공연의 타이틀도 ‘봄날은 간다’(2012)였다. 철학자 김영민 교수가 쓴 인문학 에세이집 ‘봄날은 간다’도 있다. 김영민은 말한다.

"이론은 꽃과 같은 것이다. 조금씩 이울어가는 상처의 역사 속에서만 이론의 뜻이 있다. 이론은 역사적이지만, 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아얀 고추꽃이 떨어지면서 녹색의 싱싱한 고추가 맺히듯이, 이론은 이울고 숙지는 스스로의 무게 속에서 그 고유한 가치를 빛낸다. 지지 않는 꽃은 조화이고, 지지 않는 이론은 한갓 성경이거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또 가수 캔이 부른 ‘내 생애 봄날은 간다’도 있다. 뒷골목 3류 인생들의 사랑노래였는데 크게 히트 친 걸로 기억난다.

“촛불처럼 짧은 사랑,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려 했건만, 저 하늘이 외면하는 그 순간, 내 생애 봄날은 간다“

김용택 시인의 시 ‘봄날은 간다’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시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천일의 약속’(2011)에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주인공 이서연(수애 분)의 독백으로 인용돼 화제가 되었다.

“꽃도 잎도 다 졌느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느니라.“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봄날은 간다'는 이윤기 선생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는 그의 소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간에 방울을 달아놓으면 설사 그것이 쇠방울이라고 할지라도, 세월을 어찌 보내느냐에 따라 그 주머니가 은방울로 되기도 하고 금방울로 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시간을 잘못 보내면 쇠방울은 녹슨 쇠방울로 밖에는 되지 못할 테지.... 당신 말이야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왜 그 오랜 세월 잊히지 않고 불리는지 알아?.... 시간에 방울을 달지 못한 자들의 노래야... “

여섯째 버전은 2010년 작고한 이윤기 선생을 기려서 그의 선후배 동료들이 이듬해 선생의 기일에 출간한 추모서적 ‘봄날은 간다: 신화 속으로 떠난 이윤기를 그리며’이다. 출간 즉시 사서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의 글만 읽고는 서가에 꽂아 두었다. 며칠 전에 다시 꺼내 들었다.

존경스러운 이윤기 선생이 이 봄날에 나는 많이 보고 싶다. 책을 통해서는 무수히 만났지만 실제로 나는 그를 딱 한번 만났다. 어느 초상집에서 문상객으로 우연히 만났던 선생. 나를 이윤기 선생께 소개시켜주었던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 선생과 함께 그의 구라(?)에 도취되었던 추억이 새롭다.

나는 담배도 피지 않지만, 소문난 체인 스모커답게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스토리텔링에 열을 올리던 이윤기 선생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당시에는 장례식장에서도 자유롭게 담배를 필 수 있었다.) 소설가, 번역가, 신화전문가인 이윤기 선생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번역한 적이 있다. 니코스의 자작 묘비명은 아래와 같다. 바로 이윤기 선생이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홍콩의 왕가위 감독이 2000년에 만든 ‘화양연화’라는 영화가 있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주연을 맡았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문자 그대로 ‘꽃처럼 빛나는 세월’ 그러니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말한다. 사계절로 보면 엄혹한 겨울 추위를 딛고 꽃을 피운 봄날을 말한다. 그래서 ‘인생의 봄날’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생의 절정기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과거를 추억할 때 대체로 비슷한 시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로 꼽는다고 한다. 대체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일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한다. 물론 그 이후의 일이 더 뚜렷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특정 시기의 일이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회고 절정(Reminiscence Bump)’ 혹은 ‘추억절정’이라고 부른다.

영화 ‘화양연화’에서는 주인공 리첸(장만옥 분)과 차우(양조위 분) 두 사람에게는 그들이 서로 낭만적 사랑을 나누었던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그 시절이 화양연화였을 것이다. 50대 중반의  내가 인생의 말년에 추억하게 될 회고절정의 시기는 언제일까.  나의 화양연화, 나의 봄날은 언제가 될까.

훗날 내가 내 인생의 봄날을 회고할 때 더 아름다운 낭만과 추억이 충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가 좋다. 이윤기 선생의 표현처럼 아마도 내가 시간에 방울을 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내 시간에 방울을 달아 볼까나. 그런데 문제는 ‘시간의 방울’은 도대체 어떻게 다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 이렇게 또 봄날은 간다.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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