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이러스와 마스크의 심리학

지난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인근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길거리를 걷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역 인근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길거리를 걷고 있다. / 연합뉴스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때는 지난 1992년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95년 겨울이었으니 벌써 20년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는데 동절기라 외출할 때는 꼭 마스크를 착용했다. 하늘색의 약간 두꺼운 천으로 된 부드러운 마스크였던 걸로 기억한다. 마스크는 감기가 들었을 때가 아니라도 방한용으로도 그만이다.

수도 한복판인 베이징에 여전히 우마차가 돌아다니고 있던 90년대 초 중국에 마스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마스크는 외과의사들이 수술을 할 때나 착용하던 특수한 물품이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에도 나는 가족들과 함께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연말이라 내외국인들로 백화점은 붐볐다. 우릴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는 외국인들과는 달리, 중국인들은 마스크를 한 우리 가족을 보고 외계인이나 본 듯이 신기해하며 말을 걸고 깔깔거리던 기억이 난다. 젊은 부부와 유치원생 또래의 아들을 비롯한 우리 3가족이 한결같이 저마다 다른 색깔의 마스크를 하고 있었으니 더욱 눈에 띄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냥 입을 가리는 것만 마스크라는 외래어로 말하고, 얼굴에 쓰는 것은 가면, 복면, 탈 등 여러 가지 다른 용어를 쓰지만 서양 사람들은 마스크(mask)라는 한 단어로 이 모든 것을 뭉뚱그려 말한다. 마스크에는 그만큼 다양한 종류가 있고 각각의 상징이 있다는 말이다.

'타짜', '식객' 등의 만화로 유명한 허영만 화백이 70년대 초에 모 어린이 잡지에 연재했던 만화 중에 '각시탈'이란 만화가 있다. 일본 헌병의 끄나풀이었던 주인공이 어느 날, 각시탈을 쓰고 일제에 항거하는 인물이 인지장애가 있던 친형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마음을 바꿔 형의 각시탈을 쓰고는 항일투쟁을 하는 투사가 되어 맹활약을 한다. 흥미진진했던 연재만화를 보려고 매달 그 잡지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초등생 시절의 기억이 새롭다.

주인공이 쓰고 다닌 각시탈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도구다. 이처럼 마스크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은폐’다. 알다시피 중동의 여성들은 마스크를 여성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따라 신체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사용한다. 얼굴만 드러내는 히잡이나 차도르에서부터, 눈만 내놓고 온 몸을 다 가리는 니캅, 아예 눈까지 그물로 가리는 부르카까지 각 국가나 문화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마스크가 있다.

중동의 여성용 마스크가 단순히 신체의 일부 혹은 전부를 가리려는 수동적인 목적의 은폐라면,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 집단인 KKK, 혹은 일본의 닌자나 요즘의 테러리스트들이 쓰는 마스크는 적극적인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은폐이다. 홍콩 민주화를 외치던 시위대들이 착용한 복면 역시 각시탈과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의 압제에 저항, 공격하기 위한 신분 은폐가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을 위해 만들었던 가면은 죽은 이의 영혼이 육신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종교적인 의미가 강했다. 반면, 사냥한 동물의 얼굴 모양 가면을 썼던 고대인에게 마스크는 죽은 동물과의 동일시를 통해 그 동물들의 영혼이 자기 부족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는 토템적인 사고방식에서 이런 가면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한 부족처럼 자신들의 조물주를 숭배하기 위해서 혹은 성년식에 가면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우리 인류는 다양한 목적으로 마스크를 써왔다. 우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마스크를 쓸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전쟁이나 역병 등으로 억울하게 제 명에 죽지 못한 사자(死者)의 억울한 혼령이 살아있는 이승 사람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혹은 적군이나 역병, 질병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고 마스크를 썼다고 한다.

마치 민간신앙에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집안 곳곳에 붙이는 ‘부적’과 같은 용도였다. 일상적으로 썼던 것은 아니고 굿판을 벌이거나 연극, 제사 등 각종 의식을 치를 때 쓰는 의례용이었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축사(逐邪)라고 한다. 말 그대로 삿된 기운을 몰아낸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바이러스 전염을 막기 위해 쓰는 마스크가 바로 이런 기능을 갖는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역병이 세균이나 병독에 의해 전염된다는 것을 몰랐던 옛날 사람들은 부적을 몸에 지녔던 것처럼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마스크를 썼다. 반면 오늘날에는 감염원과의 직간접적인 접촉을 막는다는 매우 합리적인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마스크를 쓴다.

마스크가 이렇게 유형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스크도 있다. 사람들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각자 처한 환경에 맞게 자신의 역할을 상징하는 마스크를 쓴다. 융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심리적인 마스크를 가리켜 페르소나(persona)라고 한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전무인 사람은 회사에서는 엄숙한 전무의 마스크를 쓰더라도, 고향친구를 만났을 때는 순수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함께 우정을 회고하는 역할의 마스크를 쓴다. 귀가해서는 때로는 엄숙하고 때로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마스크를 쓴다. 물론 나이든 부모님 앞에서는 일부러라도 그들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어리광을 부리는 등 아들 마스크를 써야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심리적 마스크, 즉 페르소나를 상황과 역할에 맞게 잘 바꿔 쓴다. 이것은 위선적인 모습이 아니다.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하는 우리 인류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적시에 적절하게 사회적 역할 마스크를 갈아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회사에서 부하직원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갑질을 일삼던 남성이 고향친구들을 만나서도 ‘이래라, 저래라’ 지시 혹은 명령조의 언행으로 빈축을 사기도 한다. 심지어 비행기 승무원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이른바 ‘감정노동’의 대부분은 이렇게 마스크를 잘 바꿔 쓰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크게 명성을 얻었거나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의 경우에는 특정 상황에서만 써야할 마스크를 결코 벗으려 하지 않고, 늘 그 마스크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설상가상 그 지위에서 내려왔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 자신의 지위에 상응하는 마스크를 쓰고 한사코 그런 역할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이들은 페르소나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들의 일시적인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상징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마스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자신의 심리적인 마스크를 자신의 진짜 자아(ego)로 착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가 품절 사태를 맞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 마스크 생산량을 고려하면 결코 품절 사태가 생길 수가 없다고 한다. 마스크는 종류별로 교체주기가 따로 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경우도 있고, 필터링 기능이 떨어질 때까지 몇 차례 쓸 수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마스크는 적절한 때에 바꿔 써야한다. 그것이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한 유형의 마스크든, 사회적 관계 유지를 위한 무형의 심리적인 마스크든 마찬가지다. 당국은 정책적인 실패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게 제발 좀 제대로 된 마스크 수급 하나라도 제대로 챙겨주면 좋겠다.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김진국 문화평론가(심리학자 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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