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 비용 줄였지만 사업장 변경 여전히 제한적
체류 최장 9년 10개월, 정주영주권 통로 막혀 있어
비닐하우스·농막·컨테이너···열악한 주거 문제 지속
일본·싱가포르·캐나다, 제도 개혁으로 대안 모색 중

2024년 기준 한국 체류 외국인은 265만명, 전체 인구의 5.2%에 이른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며 다민족 사회이자 글로벌 이주 국가를 향해 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단일민족 도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 시리즈는 전국 곳곳에 형성된 이민자 커뮤니티를 직접 방문해 체류 외국인의 생활 양식 등을 기록하고 지역별 이주 사회의 모습과 서사를 '이민자 지도'로 구축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에는 외국인 비자 제도 전반과 주요 체류 자격별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이민 정책의 큰 그림을 조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민정책 전반을 통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편집자주]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가 지게차에 묶여 학대당하는 영상이 공개되자 고용허가제(EPS)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은 "이번 사건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강제노동 체제의 산물"이라며 사업장 변경 제한과 고용 연장 권한 독점이 노동자를 무권리 상태로 몰아넣는다고 지적한다. 제도 폐지와 '노동허가제'로의 전환까지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지는 추세다.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가 지게차에 묶여 학대당하는 영상이 공개되자 고용허가제(EPS)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광주전남이주민지원센터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가 지게차에 묶여 학대당하는 영상이 공개되자 고용허가제(EPS)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광주전남이주민지원센터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단순한 현장 일탈이 아니라, 20년간 누적된 제도적 모순이 드러난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브로커 비용을 줄이고 합법 고용의 틀을 마련했다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순환형 단기 체류'라는 태생적 한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지적이다. 정주 기반을 마련해 숙련 인력을 활용할지, 아니면 단기 순환형 제도로 유지할지는 한국 사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선택 과제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용허가제(EPS)는 2004년 산업연수생 제도의 문제를 대체하기 위해 도입됐다. 산업연수생 제도 시행 당시 외국인 노동자들은 '연수생' 신분으로 들어왔지만 실제로는 값싼 노동력으로 투입되면서 근로기준법 적용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송출 과정에서 수백만~수천만원의 브로커 비용이 발생했고 노동자들은 합법적 보호 장치 없이 현장에 투입됐다.

이런 구조적 착취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송출국 정부와 직접 협정을 맺고 공공기관이 선발·파견을 관리하는 '정부 대 정부(G2G)' 방식을 출범시킨 것이다. 한국어능력시험과 기초 교육을 거친 노동자만 명부에 오를 수 있었고 표준근로계약과 4대 보험, 산재보험, 귀국비용보험 등이 의무화됐다.

20년이 지난 지금, EPS는 한국 산업 현장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누적 입국자는 130만명을 넘었고 현재 약 26만명이 체류 중이다. 매년 6만~7만 명이 이 제도를 통해 새로 들어온다. 지난해 외국인 고용허가제 상한선은 16만5000명으로 확대됐지만 절반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트남, 네팔, 캄보디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16개 협정국에서 선발된 노동자들은 제조업, 농축산업, 건설업 등 인력난 업종에 투입된다.

고용허가제 비자(E-9)는 기본적으로 단기 순환형 제도로 설계돼 있다. 최초 3년 체류 후 한 차례 연장해 최대 4년 10개월까지 머물 수 있으며 원칙적으로는 귀국을 전제로 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같은 사업장에서 재고용을 거쳐 7~10년간 머무는 사례도 있지만, 제도상 영주권으로 이어지는 길은 거의 차단돼 있다.

그 핵심 이유는 E-9가 애초에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비자라는 점 때문이다. 최대 4년 10개월 체류 후 반드시 출국해야 하며 성실근로자 재입국 특례를 활용해도 합산 기간은 9년 8개월에 그친다. 이 과정에서 중간 출국이 불가피해 ‘10년 연속 거주’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영주권 심사 문턱을 넘을 수 없다.

따라서 영주권을 희망한다면 비자 전환이 필요하다. 일정 기간 근속과 숙련도 인정이 전제되면 E-9에서 비전문 숙련인력(E-7)으로 바꿀 수 있으며, 한국어 능력·기술 자격·근속 연수 같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정부가 일부 업종에서 전환 기회를 확대하고 있지만 절차는 여전히 까다롭고 소득·자산 요건까지 요구돼 실제로 영주권(F-5)에 도달하는 노동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정영섭 이주노동자 평등연대 집행위원은 고용허가제를 두고 '브로커는 줄였지만 강제노동 구조가 남아 있는 제도'라고 말했다. 고용허가제 하 구직 등록을 하루만 늦어도 곧바로 미등록자가 되고 사업장 변경은 법정 사유가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올 경우 임금 체납, 사업장 휴·폐업, 산업재해 등 일부 사유에만 이동이 허용된다. 정 집행위원은 "정부는 4년 10개월짜리 단기 순환이라고 보지만 실제로는 10년 가까이 일하는 노동자가 많고 그 이상 체류를 연장할 길은 막혀 있는 제도"라고 지적했다.

숙소 문제도 고질적이다. 농촌과 어촌에는 비닐하우스 농막,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 숙소가 빈번히 활용된다. 건설 현장용 컨테이너를 '임시 숙소'로 등록해 수년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농지 위 숙소를 편법으로 인정받는 사례도 있다. 지자체가 임시 숙소를 신고받을 때 근로기준법상 기숙사 기준은 확인하지 않고 건축물 등록만 보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관리 사각지대가 생긴다. 여름철 폭염과 겨울철 화재 위험, 환기 부족 문제는 매년 언론에서 지적하지만 실질적인 개선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주민 노동자는 사업장을 옮기지 못하면 열악한 숙소에서 계속 머물러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공공 기숙사 확충을 시도하고 있다. 일부 지역은 농식품부 예산으로 40~50명 규모 기숙사를 짓고 농협에 관리 위탁하고 있다. 그러나 군 단위 전체를 커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현장에서는 “차라리 숙소를 짧게 쓰더라도 노동자가 사업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게 하는 것이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의료와 사회보장 사각지대도 문제다. 미등록 상태에서 응급실을 찾으면 국제 수가가 적용돼 내국인보다 비싼 병원비가 청구된다. 건강보험 체납 규정도 외국인에게 더 엄격하다. 농어촌 노동자는 사업장이 영세해 '직장' 건강보험 가입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보험료가 비싼 ‘지역’ 가입을 선택해야 한다. 폭우·폭염 등 재난 상황 발생 시 국가적 지원에서도 배제된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민생회복 소비쿠폰’ 정책에서도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은 원칙적으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제주는 고용허가제의 지역적 한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소다. 한용길 제주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장은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이 고용허가제로 제주에 온 노동자의 고립을 심화시킨다고 봤다. 한 센터장은 “도민은 육지로 쉽게 오가지만 외국인 노동자는 문화생활을 즐기려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 사업장을 옮기려 해도 고용주 입장에서는 ‘이탈’로 보인다”고 했다. 젊은 노동자들은 단순한 임금이 아니라 문화 향유와 성장의 기회를 찾는다. 그러나 이를 제공하지 못하면 수도권으로 떠난다. 이는 제주 청년이 육지를 떠나는 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주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서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민이 도움을 받고 있다. /허아은 기자
제주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에서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온 이주민이 도움을 받고 있다. /허아은 기자

그는 외국인을 노동력이 아닌 주민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 정착할 수 있는 정주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주이주민센터는 죽은 상권을 다문화 거리와 레스토랑으로 재생하고, 다민족 문화제를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제안도 내놨던 바 있다. 하지만 외국인 주민 비중이 전국 상위권임에도 제주도의 전담 행정조직은 팀 단위에 불과하고, 다문화 교류 공간 같은 공공 거점은 부족하다.

이한숙 이주와인권연구소 소장은 “정부는 수요가 생기면 규제를 풀어 대규모로 인력을 들여왔지만 숙소 준비는 없었다”며 “거제 조선업에서는 창고를 개조하고 방을 쪼개 숙소로 쓰는 일이 벌어졌다. 사람을 동물 데려오듯 취급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고용허가제 비자 적용 기한 내 태어난 ‘동반 체류 자격’으로 자란 아이가 성년이 되면 체류 전환 경로가 없어 자동으로 미등록자가 되는 구조 역시 개선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해외 주요국들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제도 개혁을 추진 중이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이어온 연수생 제도를 점진적 폐지하고 2027년부터 고용을 통한 역량개발(ESD) 제도로 전환할 방침이다. 동일 직종 내 이직을 허용하고, 숙련을 쌓으면 상위 비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 숙련 정착을 유도한다.

싱가포르는 업종별 쿼터(DRC)와 고용부담금(Levy)을 병행해 외국인 고용 규모를 정교하게 조절한다. 기업은 외국인을 고용할수록 비용 부담이 커져 내국인 일자리 보호와 수급 균형을 동시에 달성한다는 이점이 있다.

한편 캐나다는 임시외국인노동자프로그램(TFWP)을 운영하며 고용주가 노동시장영향평가(LMIA)를 제출해 내국인 대체 가능성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저임금 직종에는 상한제를 적용해 내국인과의 균형을 유지한다. 다만 농업 분야에서는 숙소와 장시간 노동 문제로 인권 리스크가 여전하다는 비판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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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경제신문 허아은 기자 ahgentum@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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