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지배, 전쟁, 냉전···현대사 상흔 남은 동두천
나이지리아로부터 독립 희망 비아프라 한국지부
한국서 노동자 된 가나 가수, 다시 노래하게 되다
동두천 이주민 2세대와 한국인 걸그룹 프로젝트

2024년 기준 한국 체류 외국인은 265만명, 전체 인구의 5.2%에 이른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며 다민족 사회이자 글로벌 이주 국가를 향해 진입한 상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단일민족 도그마에 머물러 있다. 이 시리즈는 전국 곳곳에 형성된 이민자 커뮤니티를 직접 방문해 체류 외국인의 생활 양식 등을 기록하고 지역별 이주 사회의 모습과 서사를 '이민자 지도'로 구축하는 것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이후에는 외국인 비자 제도 전반과 주요 체류 자격별 현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이민 정책의 큰 그림을 조망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민정책 전반을 통합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필요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짚어볼 것이다. [편집자주]

경기도 동두천시는 더 이상 '군사도시'라는 오래된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비아프라의 후손과 나이지리아 및 가나 출신 이주민, 그리고 한국인 청소년들이 음악과 예술로 만나 지역 사회와 화합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다문화 현실을 보여주는 동두천은 그와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일제강점기 동두천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및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와 물류의 거점이었다. 국권 피탈 이듬해인 1911년 일제는 경성(현 서울)과 동두천을 잇는 경원선을 개통하고 추후 이를 철원까지로 늘렸다. 서울과 연천을 잇는 '경원가도(京元街道, 현 국도 3호선 일부)'도 동두천을 가로질러 개통됐다. 이 도로는 병력의 이동과 무기 및 보급품 수송에 사용되며 육상 군사도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일제가 패망한 이후 동두천은 38선 인근 지역으로 재편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동두천에서는 치열한 전투에 따른 점령 및 탈환이 반복된다. 전쟁 초기 38선 전투 중심지였던 동두천에서는 방어 진지가 연이어 무너져 국군이 막심한 피해를 봤다. 전쟁 중반기에서 휴전 직전까지는 북한군의 남하, 중공군 북상 루트였던 탓에 전쟁 중 생활 기반이 대부분 불에 타거나 파괴됐으며 민간인 희생자와 실향민이 대거 발생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2년 뒤인 1955년, 미군은 동두천시에 캠프 케이시(Camp Casey)를 비롯한 여러 부대를 설립하고 주둔을 시작한다. 농촌이었던 동두천은 이때부터 군사도시로 탈바꿈하며 보산역 일대에는 기지촌이 형성된다. 동두천은 DMZ로부터 약 20㎞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북한의 육상 돌발 행동 시 파주시나 연천군에 주둔할 때보다 대응할 시간을 길게 가질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주한미군은 동두천에 주둔함으로써 일제강점기 당시 전략적으로 만들어졌던 교통 인프라 역시 보수 및 확장해 활용했다.

1990년대 동두천시 보산동 인근 위락시설 /연합뉴스
1990년대 동두천시 보산동 인근 위락시설 /연합뉴스

지리적 요충지였던 동시에 38선 인근에 위치했던 탓에 그 어느 지역보다도 침략과 분단, 전투와 냉전의 상흔이 깊게 남았던 동두천에 이제는 지도상 어느 곳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나라, '비아프라(Biafra)' 이주민이 살고 있다.

비아프라는 1967년 5월, 나이지리아 동남부의 이보(Igbo)족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한 비아프라 공화국이다. 석유가 풍부한 지역의 정치적 자율성을 둘러싼 갈등에서 비롯된 이 독립은 곧 중앙정부의 무력 진압으로 이어졌고 3년에 걸친 내전으로 확산됐다. 이른바 '비아프라 전쟁'이라 불리는 이 분쟁에서 약 100만~200만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은 1970년 나이지리아 정부의 승리로 끝났고 비아프라는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비아프라 전쟁은 단순한 지역 내 갈등이 아니라 식민지 시절부터 누적된 정치·경제적 불균형과 제국주의 유산이 폭발한 결과였다. 이 점에서 비아프라 출신 이주민의 한국 동두천 정착은 탈식민과 냉전, 분단의 잔재 위에 삶을 이어가는 또 한 겹의 디아스포라다.

나이지리아는 20세기 초 대영제국에 의해 형성된 인공 국가다. 당시 대영제국은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재편하며 언어·종교·문화가 전혀 다른 여러 민족을 하나의 행정 단위로 묶었다. 북부의 하우사-풀라니족, 남서부의 요루바족, 동남부의 이보족은 전혀 다른 정치·사회 구조를 가졌으나 대영제국은 식민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북부 무슬림 엘리트에게 권력을 몰아주는 분할 통치 전략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았던 이보족은 행정과 상업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독립 이후 반복된 정치적 배제와 보복의 대상이 됐다.

비아프라 전쟁 당시 찍힌 사진으로 게시판에는 '비아프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나이지리아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To Ensure Biafra's Freedom, We Must Stem Nigerian Aggression).'고 쓰여 있다. /SNS
비아프라 전쟁 당시 찍힌 사진으로 게시판에는 '비아프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는 나이지리아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To Ensure Biafra's Freedom, We Must Stem Nigerian Aggression).'고 쓰여 있다. /SNS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나이지리아 중앙정부는 하우사족과 요루바족 중심의 권력을 유지했다. 여기에 동남부의 석유 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얽히고 냉전 구도 속 서구 열강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분쟁은 격화됐다. 전쟁 당시 비아프라를 지원한 국가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서독 등이었으며 소련과 불가리아, 동독 및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지원했다. 국제적십자사는 중립성을 지키기 어려워 나이지리아로 진입하지 못했다. '국경없는의사회(MSF)'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서구 열강의 대리전 성격을 띠었던 한국전쟁이 흔적을 남긴 동두천에, 비슷한 전쟁을 치른 비아프라 후손이 정착했다는 사실은 제국주의와 분단의 유산이 오늘날 삶의 조건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비아프라 전쟁 이후 해외로 흩어진 이보족 후손들은 'IPOB(Indigenous People of Biafra)'라는 단체를 결성해 전 세계 각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 지부는 경기도 동두천시에 위치한다. 지난 5월 여성경제신문은 IPOB 한국 지부장 데이비드 킹(David King)을 만났다.

데이비드 킹은 이날 IPOB 공식 단체복과 베레모를 착용했다. /장세곤 기자
데이비드 킹은 이날 IPOB 공식 단체복과 베레모를 착용했다. /장세곤 기자

킹은 1971년생으로 비아프라 전쟁이 끝난 직후 태어났다. 공식적으로 비아프라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로부터 "너는 비아프라의 후손"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나이지리아 사회에서 '비아프라인'이라는 정체성은 곧 차별과 배제를 의미했다.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정치·경제적 기회가 제한되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킹은 돈을 모은 뒤 다시 돌아갈 목적으로 2003년 한국에 왔다. 그러나 2014년, 본국에서 9살 어린 남동생이 비아프라 공동체 축제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가 끝내 사망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킹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됐다. 같은 해 IPOB는 전 세계에서 출범했고 킹은 한국 지부장을 맡게 됐다.

설립 초기 킹은 "한국에 있는 이보족 형제들과 그 외 나이지리아 동부 출신 공동체들을 직접 찾아 우리가 왜 IPOB 한국지부를 설립해야 하는지 설득했다"고 했다. IPOB 한국지부가 최초로 설립된 곳이 안산이었던 것도 이 탓이다. 이주민이 많은 지역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매년 5월 30일은 '비아프라 영웅의 날'로 전 세계의 IPOB 지부 회원은 거리를 행진하고 국제사회에 독립을 촉구한다. /데이비드 킹 SNS
매년 5월 30일은 '비아프라 영웅의 날'로 전 세계의 IPOB 지부 회원은 거리를 행진하고 국제사회에 독립을 촉구한다. /데이비드 킹 SNS

한국 거주 2년 차까지 다른 지역에서 살았던 킹은 비자가 만료될 것을 염려해 동두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동두천, 특히 보산동에는 미국 국적 흑인이 많이 살아서 누가 아프리카 사람이고 누가 미국 사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현재 동두천 인근에는 IPOB 한국지부 회원 1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킹은 "비아프라는 곧 '환영(welcome)'"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어디에 거주하든 그 나라의 법을 존중하고 선주민 공동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줘야 한다는 것이 IPOB의 규칙이다. 이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처지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IPOB 한국지부는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동두천에 거주하는 고령 이주민들에게 삼계탕 300그릇을 대접하기도 했다. 수혈용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에는 곧바로 팔을 걷었고 외국인 등록이 돼 있는 회원은 헌혈을 진행했다.

IPOB 한국 지부는 지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선주민을 위해 헌혈 봉사에 참여하고 손소독제도 기부했다. 동두천시와 인접한 양주시에서 '행복하우스 만들기' 봉사 활동도 실시했다. /데이비드 킹 SNS
IPOB 한국 지부는 지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선주민을 위해 헌혈 봉사에 참여하고 손소독제도 기부했다. 동두천시와 인접한 양주시에서 '행복하우스 만들기' 봉사 활동도 실시했다. /데이비드 킹 SNS

킹은 "한국 사회가 내 삶에 큰 변화를 줬다는 걸 느끼고 있다"며 "나와 가족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동두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킹은 지난 2021년 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런 이주민들과 선주민이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온 이들이 있다. 바로 동두천에 터를 잡은 예술 공간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다.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 사회에서의 관계를 예술로 표현하고자 영화감독이자 미술작가인 최원준 씨와 큐레이터이자 디렉터 문선아 씨가 2021년 공동 설립했다.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가 동두천에 둥지를 튼 데는 분명한 맥락이 있다. 이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연대를 사유할 수 있는 거점을 찾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동두천이 지닌 역사적 조건에 주목하게 됐다. 동두천에 미군기지가 설립됐던 시기, 북한은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 건물과 기념비를 무상으로 지어주며 주체사상을 전파했다. 탈냉전 이후 냉전을 대표했던 지역에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리했는지를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동두천이었다.

문 디렉터는 그간 동두천을 다룬 예술 프로젝트가 대체로 외부인의 시선에서 단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커뮤니티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작업의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주민들을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 사회에서의 관계를 예술로 표현하고자 영화감독이자 미술작가인 최원준 씨와 큐레이터이자 디렉터 문선아 씨가 2021년 공동 설립했다. /최원준 작가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역사적 맥락과 현대 사회에서의 관계를 예술로 표현하고자 영화감독이자 미술작가인 최원준 씨와 큐레이터이자 디렉터 문선아 씨가 2021년 공동 설립했다. /최원준 작가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는 본국에서 예술가로 활동했으나 한국에서 경력이 단절되고 노동자로 일하는 이주민과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난 2022년 12월 공개된 'Welcome to my funeral' 프로젝트는 가나 출신의 프로페셔널 아프로비트 뮤지션 나이팅게일의 히트곡을 한국에서 번안해 보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나이팅게일은 본국에서 인기 가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생계를 위해 공장에서 일하며 예술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최 작가와 문 그의 대표곡이자 가나 국영방송에도 방영된 적 있는 히트곡 'Holiday'를 한국에서 다시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의 힙합 가수와 협업해 녹음을 진행하고 뮤직비디오 제작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작업 도중 동두천에서 한 아프리카계 이주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유족들은 시신 송환 절차조차 몰라 막막한 상황이었고 최 작가는 방부 처리 등 복잡한 과정을 직접 도맡아 해결해야 했다. 장례 과정에서 그는 고인의 아들이 충주에서 공장 노동을 하던 이주민 청년이자 아마추어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최 작가는 그를 프로젝트에 초대하기로 했다. 처음 계획했던 'Holiday' 번안 프로젝트는 완전히 접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새로운 곡 'Welcome to my funeral'을 한국 작곡가와 함께 제작했다. 여기에 한국 힙합 뮤지션과 고인의 아들 찰스, 그리고 나이팅게일이 함께 참여했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시각적 장치는 '환타지 코핀(Fantasy Coffin)'이다. 서아프리카에서는 고인의 삶을 상징하거나 고인이 좋아하는 물건 모양으로 관을 제작하는 장례 전통이 있다. 이번 작업에서는 '윙팁(Wing Tip)'이라 불리는 신발이 모티프로 사용됐다. 최 작가는 이를 "가나에서 운구 인부들이 실제로 신는 신발인 동시에 유럽에서 건너온 식민주의의 흔적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라고 설명했다. 관 모양의 신발 오브제와 함께한 음악 작업은 죽음과 기억, 식민의 역사, 그리고 디아스포라를 하나의 예술적 언어로 엮어냈다.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는 '아프리카계 여성 이주민'에게도 주목했다. 최 작가와 문 디렉터는 이들이 가족을 지탱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축이나 공적 담론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 '마크라메 공예 워크숍'을 기획했다. '매듭 공예'라는 뜻의 마크라메는 본래 서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기법이다.

하지만 동두천에서는 한국인 강사가 아프리카 이주 여성들과 필리핀 이주 여성들에게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문 디렉터는 이 프로그램을 두고 "문화가 어떻게 이동하고 다시 거꾸로 흘러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주 여성들이 만든 작품은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 내부에 전시되기도 했다. 최 작가는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보다 여성 이주민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과정 자체가 더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문선아 디렉터(왼)와 최원준 작가 /장세곤 기자
문선아 디렉터(왼)와 최원준 작가 /장세곤 기자

스페이스 아프로아시아는 최근 '아프로지아(AfroZia)'라는 이름의 케이팝 걸그룹 프로젝트 작업물을 공개했다. 그룹명은 아프리카(Afro)와 아시아(Zia)의 결합에서 따왔다. 이는 예술적·문화적 교류에 초점을 맞추는 현대미술 프로젝트로 아프로지아의 멤버는 모두 동두천에서 나고 자란 여성 청소년이다. 가나 국적 중학생과 나이지리아 국적 중학생, 고등학생이 한 명씩 포함됐으며 나머지 3명의 멤버는 한국인이다.

문 디렉터는 가나 이주 배경 중학생 멤버인 데슬리(Desiree)와 함께 KBS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들 모두 서로 다른 배경을 지녔으나 동두천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 노래와 춤을 통해 하나의 목소리를 만든다는 점은 동일하다.

동두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학생 6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 '아프로지아(AfroZia)'. 작업물은 오는 10월 16일까지 서울 청담동 송은아트센터에 전시된다. /최원준 작가
동두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학생 6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 걸그룹 '아프로지아(AfroZia)'. 작업물은 오는 10월 16일까지 서울 청담동 송은아트센터에 전시된다. /최원준 작가

문 디렉터는 이 시도가 갖는 의미를 "한국은 이민 국가가 아니다 보니 이주민 2세 청소년들은 한국어로 생각하고 말해도 여전히 외국인으로 불린다"는 현실에서 찾았다. 실제로 이들은 학교에서는 한국인 또래와 어울리지만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한국인 친구들과 단절되기 쉽다.

그는 "아프로지아 프로젝트는 한국 청소년과 이주민 2세 청소년이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연계점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가 그동안 주로 부모 세대 이주민과 교류해 왔는데 이번 작업을 통해 2세대가 어떤 고민을 하고 학교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려 하는지 비로소 깊게 알게 됐다"고 했다. 준비 과정은 약 4개월, 멤버들은 가사를 공동 집필했고 전문 안무가의 지도를 받아 춤을 배웠다.

국적과 피부색, 문화는 달라도 이들의 음악과 춤은 하나다. 아프로지아는 외국인과 한국인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아프리카계 이주민 2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품는 고민을 드러낸다. 최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단순한 체험 프로그램이 아닌 청소년들이 스스로 예술적 성취를 일군 결과물"이라고 정의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청소년들이 함께 미래를 상상하는 장(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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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경제신문 허아은 기자 ahgentum@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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