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영의 평생부자되기]
돈보다 더 소중한 게 행복
허상에 매달리면 평생 구름 잡는 인생
내면의 탐욕과 욕망의 마그마를 깨달아
거품 낀 허상 버려야 진짜 행복 열린다
몇 년 전 ‘1년에 얼마를 벌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 답은 나라마다 달랐다. 독일인들은 1억원, 프랑스인들은 1억3000만원, 이탈리아인들은 2억원, 중동의 두바이에서는 3억원이었다고 한다. 역시 검소한 게르만인들이란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일정 수준의 소득을 넘으면 행복의 느낌은 더 증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연 소득 1억2000만원, EU의 경우는 9200만원을 넘어가면 추가적인 소득이 행복감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부자세를 주장한 사람도 있다. ‘이스털린(Esterlin) 역설’이다. 1인당 소득이 지난 50년간 모든 국가에서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적인 행복감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특정 수준의 소득을 초과하면 거액의 부자세를 징수하자는 것이다.
워런 버핏 같은 부자들이 부자세 도입에 적극 찬성하는 걸 보면 저 가설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누구나 행복 행복 한다. 그러나 그 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분명한 것은 분수에 맞지 않게 행복의 잣대를 높이면 평생 불행한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간파한 경제학자들이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스키톱스키(Scitovsky)는 구매 소비 소유로 행복을 살 수는 없고, 측정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백만장자가 주식에 투자했다가 가진 재산이 반토막 나 고통스러워하는가 하면, 가난한 사람이 절친을 오랜만에 만나 한적한 숲길을 걸으면서 더없이 행복해하기도 한다.
만약 건강과 돈을 일정 비율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아주 건강한’ 사람이 ‘조금 덜 건강’해지는 대신 돈을 더 받는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돈을 잘 쓰는 사람이 행복할까, 소비를 절제하는 사람이 행복할까. 연구 결과는 일반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저축을 더 많이 한다고 한다. 눈앞의 욕구 충족보다는 미래의 소비, 지속 가능한 소비를 염두에 두고 절제하는 것이다.
부부가 비슷하게 돈을 버는 사람과 소득격차가 큰 부부 중 누가 행복할까. 비슷하게 버는 부부가 행복하다고 한다. 부자 아내, 부자 남편처럼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면 후일 문제가 생기는 케이스가 종종 있다. 교육 수준도 비슷한 게 좋다. 가급적 유유상종(類類相從)할 일이다.
덴마크의 생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비교하지 말라’고 한다. 돈도, 직장도, 소득도 이웃과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행해진다.
철학자의 말 따라서 비교하지 않는 게 쉬울까. 어렵다. 내공이 조금 쌓인 분들이라면 돈 많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부류를 만나면, 속으로 ‘사람이 좀 모자라네’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일반 사람들은 ‘허공에 뜬 별을 잡으려고 자기도 모르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가장 흔한 예로, 아이들이 자기가 못다 한 꿈을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과외도 시키고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까지 하면서 공부하라고 떠미는 현상이 한국 어디서나 목격된다.
이게 잘 되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들어가면 문제가 없는데,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면, 그런 자식에 은근히 불만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가 심하면 대화가 단절되고 부모와 자식 간에 이런저런 이유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사람들을 흔히 보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예리하게 간파한 사람들이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Carl Jung)으로 대표되는 정신분석학자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무의식이 사실상 인간을 지배하는데, 그 무의식이란 잠재적 욕구, 실패한 경험과 못다 한 꿈들이 쌓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좌절된 욕구가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스스로 또는 가족을 압박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럴듯한 직장 들어가기가 과거와 달리 몹시 어려운 게 요사이 현실이다. 그런데 ‘저놈은 바보야’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정신병은 이런 무의식적인 압박이 현실에서 참을 수 있는 임계치를 반복하여 넘어갈 때 발생하는 병리 현상이다. 프로이트가 위대한 이유가 있다. 그 이전에는 정신병자를 미쳤다고 무조건 감금하고 학대했지만, 저런 무의식과 현실 세계의 부조화로 인한 것임을 밝혀낸 일이다. 이후 상담이라는 정신병적 치료를 의학적으로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프랑스에서는 라캉(Lacan), 바디우(Badiou), 들뢰즈(Deleuze)가 사회불안, 무질서와 인간의 불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찾아냈다.
그중 라캉의 이론을 대표적으로 소개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은 화산의 마그마처럼 늘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것을 ‘실재계’로 부른다. 그런데 이것을 이성이나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으로 억누르고 있는데, 이런 상태를 ‘상징계’라 부른다.
그러다가 잠재되어 있던 욕망의 마그마 일부가 억압을 뚫고 올라와 불만과 욕망을 분출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억눌린 욕구와 현실은 큰 괴리가 있는데, 너무 억누르기만 하고 적당히 분출하지 못하면 정신병적 현상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회현상에 적용하면 폭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혹시 욕망이 지나쳐 허공에 뜬구름 잡듯, 거품 낀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행복은 고사하고 불만과 불안으로 평생을 허비하고 만다.
철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은 천재적인 통찰을 한 분들이다. 그들은 그런 인간의 속성을 간파하여 이를 분석, 그 원인을 밝혀준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철학을 조금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심오한 철학 공부를 하여 ‘하늘에 별을 따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사회와 국가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이 상당한 착각 속에 살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내면의 무의식, 끓어오르고 있는 욕망의 마그마에 휘둘려 나도 모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아차” 할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정신분석학은 뜬구름 잡는 학문이 전혀 아니다. 매우 유용한 현실 분석의 도구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의식에 뿌리를 둔 오작동임을 알게 되면, ‘탐욕스러운 마음의 세팅’에서 생기는 헛된 욕구는 대폭 줄어들 것이다.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알아차리는데, 또 주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조금의 철학 공부는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여성경제신문 강정영 청강투자자문 대표 himaba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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