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으로 농심 창업, 국민식품 신라면 탄생
'라면쟁이'라 불린 그의 장인정신과 품질 경영
신라면 앞세워 글로벌 시장까지 농심 도약

‘먹고, 마시고, 입고, 바르고, 보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알고 보면 더 재밌는 유통가 뒷얘기와 우리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비재와 관련된 정보를 쉽고 재밌게 풀어드리겠습니다. 소비자의 합리적인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집자 주]

농심 창립자 고(故)신춘호 회장이 2004년 덴마크 왕실 훈장 수훈받는 모습 /농심
농심 창립자 고(故) 신춘호 회장이 2004년 덴마크 왕실 훈장을 수훈받는 모습 /농심

농심은 1965년 설립한 이후 신라면·짜파게티·너구리 등 스테디셀러 제품을 탄생시키며 반세기가 넘는 세월에도 현재까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농심은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40년이 넘는 동안 국내 라면 시장 1위를 차지해 온 농심의 역사는 창립자인 고(故)신춘호 회장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율촌 신춘호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순필 여사의 5남5녀 중 셋째 아들로,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전 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회장), 신동윤(율촌화학 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회장 부인) 3남2녀를 두고 있습니다.

고(故)신춘호 회장의 생전 모습 /농심
고(故) 신춘호 회장의 생전 모습 /농심

“라면은 주식이다” 농심 창업자 신춘호의 도전

신 회장은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고(故) 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 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습니다. 신춘호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는데요. 1960년대 일본에서 불어온 라면 열풍을 보며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지요. 한국에도 언젠가는 라면이 사랑받는 날이 올 것이라 믿은 그는 1965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롯데공업’을 세우고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신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한다”며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춘호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했습니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하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도 장인정신을 주문하곤 했습니다.

신춘호 회장은 창립 초기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두고, 일본 기술을 그대로 들여오기보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직접 개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안성공장 설립 때도 선진국 설비를 검토하되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거부하고, 농심만의 한국적인 맛과 노하우를 최적화할 수 있는 맞춤형 설비를 주문하며 고집스러운 품질 철학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장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양한 라면이 자리를 잡은 데다 라면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이라 첫 제품인 ‘롯데라면’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농심의 초기 출시 라면 제품인 롯데라면(왼쪽), 소고기 라면 /농심
농심의 초기 출시 라면 제품인 롯데라면(왼쪽), 소고기 라면 /농심

그렇다고 포기할 신춘호 회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외식 메뉴로 인기를 끌던 짜장면을 라면으로 개발해 ‘롯데짜장’을 선보였지만, 경쟁사들의 잇따른 출시로 또다시 좌절을 맛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지요. “소비자는 회사 이름보다 제품 이름을 기억한다.” 이 깨달음은 농심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됐습니다.

신춘호회장은 브랜드 전문가로도 유명합니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춘호 회장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녹아있었던 것이지요. 신 회장의 대표작은 역시 신라면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익숙하지만 출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이름이었습니다. 당시 브랜드는 대부분 회사명이 중심으로 돼 있었고,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 회장은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농심라면의 옛 광고. '우지파동'을 의식해 전 제품에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는 광고 문구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농심
농심라면의 옛 광고. '우지파동'을 의식해 전 제품에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는 광고 문구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농심

소고기 육수·짜파게티·새우깡, 국민 입맛 잡은 비결

농심은 맛의 차별화에도 돌입했습니다. 특히 다른 회사들이 닭 육수를 고집하던 시절, 신 회장은 ‘우리 국민은 소고기를 좋아한다’는 점에 착안해 소고기 육수 라면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1970년 ‘소고기라면’을 내놓자 시장 반응은 달라졌지요. 깊은 국물 맛이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농심의 점유율도 눈에 띄게 상승했습니다.

이 성공에 힘입어 또 다른 도전을 준비하던 신춘호 회장은 일본 출장 중 새우과자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 제품은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한국식 새우과자를 만들어보자”는 결심 아래 1년간 연구를 거듭하는 동안 4.5t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가 소진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이 아리랑을 ‘아리깡’이라 부르는 걸 듣고, ‘새우깡’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1971년 출시된 새우깡은 출시 3개월만에 매출이 3.5배 늘며 단숨에 국민 과자로 자리 잡았고 농심의 두 번째 도약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형인 신격호 회장과의 갈등으로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고 독자 노선을 걷게 됩니다. 농부의 마음을 뜻하는 ‘농심’이라는 이름 아래, 고급 스프 공장을 세웠습니다. 농심은 1980년대 ‘너구리’, ‘짜파게티’, ‘신라면’을 연이어 출시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라면으로 등극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도 오히려 농심에 새로운 기회를 안겼지요. 상대적으로 저렴한 라면 소비가 늘며 1998년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1973년 100억원, 1981년 1000억원 이후 17년 만의 성과이지요. 대형 유통업체들의 PB상품 공세 속에서도 브랜드 경쟁력과 품질로 버텨냈습니다.  

외국인들이 신라면을 먹는 모습 /농심
외국인들이 신라면을 먹는 모습 /농심

신라면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농심의 글로벌 행보

신라면은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도 수행하게 됐습니다. 신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지요. ‘한국시장에서 파는 신라면을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는 것이었는데요.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 것입니다. 여기에 고급의 이미지도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제품인데, 국가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품질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쌉니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유통채널에서는 물론이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 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지요.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며 2022년에는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하며 재계 순위 80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신 회장은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그리고 별세 직전 해인 2020년 미국 뉴욕타임즈가 신라면 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고 전해집니다. 라면은 배고픔을 덜어주는 음식에서 개인의 기호가 반영된 간편식으로 진화했고, 농심은 끊임없는 도전의 역사로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에서 그 활약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여성경제신문 류빈 기자 rba@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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