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 (9)
라스페치아 친퀘테레 프로토베네레
고요하고 은밀했던 지중해 마을
나영석 PD와 세븐틴의 바로 그곳
(지난 회에서 이어짐)
라스페치아를 떠나기 전 포르토베네레에 가기로 했다. 리구리아 해변의 포르토베네레는 친퀘테레와 더불어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은 세계문화유산 도시로 지정된 곳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는 그 이름에 이미 힌트가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곳에 아름다움과 사랑의 신 비너스의 이름을 붙였다. 포르토베네레는 비너스의 항구라는 뜻이다. 친퀘테레로 가서 페리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는데 확인해보니 숙소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버스 이동이다.

포르토베네레까지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찾아왔는데 버스티켓을 파는 곳이 없다. 하필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아서 번역기를 준비해 두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을 한참이나 기다렸다.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에서는 발권 키오스크 같은 것이 있다. 목적지를 찍고 티켓을 구매했는데 이탈리아에 오니 또 생소하다.
여행이란 매 순간 새롭고 무엇 하나는 배우고 익히게 된다.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는 동안 버스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진땀이 나려는데 모녀 여행객이 나타났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알아낸 내용은 이랬다.
“버스표를 사려면 담뱃가게를 찾으세요. 이 동네에 살지 않아서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담뱃가게에서 버스표를 판다니 황당했지만 흩어져서 담뱃가게를 찾아 헤맸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빌딩 1층을 모두 뒤지고 골목을 따라가며 눈을 씻고 찾았지만 도무지 담뱃가게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동양인 무리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건지 곱슬머리의 청년이 도와주겠다며 다가왔다. 담뱃가게를 찾는다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바로 옆 골목을 가리켰다. 열 번쯤 지나친 건물이다. 벽처럼 보였던 불투명 유리문 옆으로 아이 손바닥 크기의 원에 T라고 쓰인 글자가 보인다. 타바키(Tabacchi) 를 나타내는 간판이다.
구글이 담뱃가게라고 번역해 준 타바키는 그러니까 우리의 편의점 같은 곳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듯 원래는 담배를 파는 곳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버스표, 잡지, 빵이나 과자같이 잡다한 것을 파는 곳이다. 발에 불이 나기 직전에 버스표를 구매하는 시스템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 버스표만이 아니라 배표도 타바키에서 판다. 우리는 나중에 시칠리아에 들어가는 배표도 타바키에서 샀다. 가게는 할머니 한 분이 판매원으로 있는 편의점 정도의 크기였지만 서울의 복권판매소 혹은 옛날 구두 수선 컨테이너처럼 한 평 남짓한 작은 사이즈도 많다. 알고 나면 모든 게 잘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그날 이후로는 어딜 가나 어느 골목에나 그렇게 타바키가 많았다.

엄청나게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할머니로부터 초조하게 왕복 버스표를 사고 나왔을 때 버스는 막 출발하는 참이었다. 팔을 크게 휘저으며 기다려 달라는 신호를 본 기사님이 버스를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버스에 올라보니 아까 우리에게 담뱃가게를 찾으라고 했던 모녀가 기사에게 부탁한 모양이었다. 기사가 우리를 보며 윙크했고 나는 손을 모아 고맙다는 몸 인사를 했다. 웃음을 주고받으며 따스해진다.
여유를 찾고 나니 버스 안이 눈에 들어온다. 대도시에서 만난 풍경보다는 확실히 소란스럽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크고 웃음소리도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외국 여행자는 우리뿐인 듯, 아니 외국인이야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우리 말고 아시아 사람은 없다.
현지인들이 타는 시외버스에 타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이탈리아어 백색소음 속에서 마음이 편안했다. 졸음이 오던 찰나였는데 버스 뒤에 있던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르신이 노래를 틀더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공공장소에서 스피커폰이라니 몰상식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버스 안 사람들은 그저 웃었다.
“아무리 노래 좋아하는 이탈리아라지만 버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좀 너무한데?”
그러고 있을 때 버스 앞쪽에서 어떤 여자애가 소리를 질렀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분명히 당장 끄라거나 조용히 하라는 항의일 것이다. 어린 친구가 용감하다며 우리끼리 속삭이는 긴장의 순간이었다. 노인이 서 있어도 먼저 탄 학생, 젊은 사람들이 좌석에 앉은 채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 것도 문화충격이었는데 급기야 저렇게 조용히 하라며 소리까지 지르며 따지다니···.
할아버지도 무어라 소리를 지르고 다시 소녀 목소리가 단말음으로 커지는 반응이 몇 번 오갔다. 무슨 일이 생기려나 잔뜩 긴장한 우리와 달리 다른 사람들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급기야 소리를 지르던 소녀가 못 참겠다는 듯 성큼성큼 할아버지 쪽으로 왔다. 소녀는 다시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도 더 크게 무어라 받아치며 서로 노려본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안디아모~" "안디아모~"
처음보다 볼륨이 훨씬 커진 음악 소리가 들리고 둘은 그렇게 소리 질렀던 것 같다. 일순간 정적. 우리는 설마설마하고 있는데 갑자기···
춤을 춘다. 소녀와 할아버지는 마주 보고 리듬을 주고받았고 사람들은 둘을 구경하며 어깨를 들썩이거나 혼자 흥에 겨워 스텝을 밟았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고 버스 기사는 말없이 웃었다. 우리는 그저 너무 놀라서 얼이 빠질 것 같았다.
얼마간 넋이 나갔다가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야 웃었다. 배가 아프도록 웃고 박수로 할아버지와 소녀의 박자를 맞춰주었다. 조금 긴 구간을 그렇게 가다가 정차했을 때 소녀 무리가 손 키스를 날리며 버스에서 내린다. 생생하고도 짧은 꿈같은 시간이었다.
“푸하하하 그러니까 음악을 끄라는 게 아니라 음악을 신청한 거였어.”
15살 소녀와 70세 할아버지의 즉흥 댄스와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 떠올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얘기한다. 남미 여행에서, 아일랜드 펍에서 목격하는 흥 폭발 순간처럼 강렬한 이탈리아 버전 노래방 버스 기억.

포르토베네레 마을 역시 알록달록 색의 향연이다. 요트로 가득한 항구를 지나 10분쯤 걸어 올라가면 산 피에트로 성당이 나타난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산 피에트로 성당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암벽 위에 세워져 있다. 포르토 베네레의 아름다운 시가지와 바다의 풍경을 볼 수 있는 훌륭한 전망을 즐겼다.
산피에트로 성당에서 다시 10분 정도 골목골목 돌아가면 산 로렌조 성당이 있다. 성당을 찾아가는 동안 만나는 마을의 깊은 골목과 작은 카페, 꽃과 기념품으로 빛나는 마을이 구석구석 아름답다. 로렌조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리아 성이 있다. 바위 언덕에 자리 잡은 도리아 성은 단단한 요새처럼 보였는데 현재는 많은 전시회와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해가 기운을 잃을 때 도리아 성에서 길을 되돌아 나왔다. 로렌조 성당을 지나서 산 피에트로 교회를 바라보며 돌아와 이 달콤한 도시를 떠나기 전에 진짜배기 젤라토를 먹었다. 항구에서 노을을 맞는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날, 포르토베네레 여행을 위해 보낸 오늘 하루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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