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어쩌다 한 달, 이탈리아(11)
끝내 실패한 설계도로 만든 걸작
짜고 절박한 이탈리아어 학습법
비아레조에서 아침에 차를 몰아 피사로 향했다. 바다 도시 특유의 습한 공기와 함께 시동을 걸며 처음 한 생각은 '기울어진 탑 다시 봐야지!' 달리는 동안, 피사에 대한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25년 전, 출장 중 짧게 허둥지둥 들렸던 도시는 기억 속에서 애매하게 기울어진 사탑의 이미지로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번엔 좀 더 제대로 보고 오자.’ 다짐이었다. 기울어진 탑의 기이하고 우아하고 유쾌한 실수로 가득한 도시를 보고 싶었다.
도착해 보면 피사는 정말 많은 것들이 기울어진 도시다. 도시 전체 건물이 모두 살짝 비틀어져 있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시선을 잡아끌면서 균형감이 묘하게 어긋나 있다. 말하자면 아름답지만 약간 낮술에 취한 듯 보인다고 해야 할까?
청명한 날이었는데 살짝 취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이 도시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관광객이 많았다. 이래서야 제대로 보기는커녕 이미지만 헝클어질 것 같다. 오래전 짧은 방문의 여운으로 끝내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비틀린 길을 휘청거리며 걸었다.

역대급 인파와 소매치기 주의보 알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맹렬히 쏟아져 흘러드는 인파에 휩싸여 도로 옆 인도로 줄지어 선 사람들 사이에서 관람 줄을 섰다. ‘기울어진 탑’보다 나의 인내심이 먼저 쓰러질지도 몰랐다. 사람이 너무 많으니 관광 자체가 체력전이다. 피렌체의 예술적 포만감도 아니고 로마 유적의 광대함도 아니고 기묘한 삐딱함을 보기 위해 몰려든 피사의 셀카봉 행렬이 도시 곳곳 하나같이 삐딱한 건물들과 섞인다.
볼수록 신기하긴 하다. 탑만 기운 게 아니라, 벽도, 창문도, 심지어 표지판도 약간씩 비틀어져 있었다. 땅이 이 정도로 기울었다면, 기울어진 도시에서 똑바로 보려면, 사람들도 맞춰 조금 비틀어져야 균형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피사의 상징은 단연코 기울어진 탑(Torre Pendente di Pisa)이다. 공식 명칭은 ‘두오모 종탑(Campanile del Duomo)’. 1173년에 착공한 이 돌탑은, 건축가가 3층까지 쌓자 땅이 스르르 주저앉으며 몸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5년 만에 탑이 기울며 공사는 중단됐다. 이후 100년 가까이 공사가 멈추었지만 건축가들은 기울어진 채 계속 쌓는 법을 고민했다.
놀랍게도 공사는 무려 200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그 긴 세월 동안 “혹시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이탈리아식 낙천주의가 그 기울기를 그냥 두었다고 해두자. 결국은 경사를 계산해서 위로 갈수록 휘는 구조로 완성한 이 건물은, 말하자면 중세 건축 기술의 매우 낙천적인 결과물이다. 오늘날 탑의 기울기는 약 4도. 누가 봐도 ‘설계 실수’였지만, 그 실수가 도시 전체를 먹여 살리고 불균형이 도시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으니 사람이나 건물이나 운명은 참으로 알 수 없다.
탑 꼭대기에 올라가면 진짜 균형 감각이 흔들리는데, 그 순간 문득 인생도 이런 것 아닐까 싶었다. 완벽해지려고 애쓰기보단 살짝 기울어진 채로도 멋지게 살아가면 그게 더 사람다운 것이라고.
피사의 사탑은 사실 혼자만 스타가 아니다. 두오모 광장(Piazza dei Miracoli, ‘기적의 광장’)에는 명불허전의 유물들, 중심의 두오모 대성당과 탑 외에도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세 건축물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서로 경쟁하듯 미적 감각을 뽐낸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으로 불리는 두오모 대성당은 외부만큼이나 성당 내부도 감탄을 쏟게 한다. 1595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내부는 이미 수많은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복원물과 남은 조각품들은 인상 깊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가 조각한 대리석 설교단이다. 14세기 초에 제작된 이 육각형의 걸작은, 성경 속 장면들을 섬세하게 부조로 표현하고 있다.

그 섬세함은 르네상스 이전 고딕 조각의 정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감정이 살아 있고, 천사와 성인들은 정면을 응시하며 마주친 나의 시간마저 멈춰 세웠다. 조반니는 미켈란젤로보다 한 세기 이전 인물이지만, 그 솜씨는 전혀 밀리지 않는다.
광장에서 내게 조용하고 깊은 울림을 선사한 곳은 바로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이다. 유럽 최대 규모의 세례당으로, 내부에 들어서면 ‘웅장함’보다 ‘고요함’이 먼저 다가온다. 이곳 역시 조반니 피사노의 손길이 닿아 있으며, 중심에 놓인 설교단과 세례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조각 전시회를 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묘미는 음향이다. 세례당 천장은 놀라운 반향 효과를 만들어낸다. 세례당에서 “아~” 하고 소리를 내면, 몇 초 뒤 천장과 벽이 그것을 반사하여 “아아아~” 하며 화음을 만들어낸다. 내가 들어섰을 때 어느 관광객이 이 소리를 흉내 냈는데 거짓말을 조금 보태도 좋다면 마치 바흐의 성가처럼 울려 퍼져 단순한 소리가 천상의 합창처럼 들리기도 했다. 조용히 숨을 죽였다. 피사의 가장 조용한 기적은, 이 고요한 공간에서 가장 크게 울렸다.
피사는 중세 이탈리아 4대 해상 공화국 중 하나였다. 지금은 그저 기울어진 탑이 있는 작은 도시처럼 여겨지지만 11세기경에는 지중해에서 함대 끌고 다니며 영향력을 떨치던 도시국가였다. 그 전성기의 흔적은 도시의 구석구석, 특히 아르노강 근처에 남아 있다. 피사 여정의 피날레는 아르노 강변의 조용한 산책을 추천한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탑과 광장에 몰려있기 때문에 강가로 나가면 마치 전혀 다른 도시에 들어선 듯한 고요를 만날 수 있다. 피사의 옛 영광은 이 강을 통해 중세 해상 공화국으로 성장했던 시절에 있다. 그 흔적이 고풍스러운 교회, 낡은 석조 다리 그리고 피사 대학교 건물들의 표정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조용한 거리와 낡은 교회, 현지인들만 아는 파스타 맛집도 발견할 수 있다. '오스테리아 디 카르미네'라는 곳에서 라구 파스타를 먹을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줄이 너무나 길었다. 갈증과 허기를 달랠 곳으로 맛집 보장 리본 마크가 있는 샌드위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점심으로 산 파니니를 한 입 베어 물자 충격이 혀를 공격해 왔다. 소시지와 절인 야채, 치즈 말고 무얼 끼워 넣은 것일까? 소금 농도가 마치 바닷물을 응축해 구운 듯했는데, 짠맛으로 혀는 마비되었고 씹을 수 없었다. 배가 고팠지만 빵 부분을 조금씩 긁어 먹다가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가장 열심히 외운 이탈리아어는 “Per favore, rimuovi il sale!” — “제발요, 소금은 빼 주세요!”다. 이 얼마나 절박한 학습 방법이란 말인가. 나의 가장 실용적인 이탈리아어가 되었다. 슬픈 일이지만 기울어진 종탑보다 충격적인 짠맛이 더욱 강렬한 피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피사는, 참 신기하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삐뚤어진' 것으로 이토록 많은 사람을 매혹하고 끌어당긴다. 떠나기 전, 나는 피사의 사탑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인파를 피해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문득, 내가 너무 기대하고 온 건 아닐까 싶었다. 25년 전, 출장 틈에 잠시 들러 봤던 그때가 지금보다 더 생생했고, 더 놀라웠다.
짠맛의 충격과 관광 인파의 피로가 감동을 덜어내 조금 시들한 느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감동은 언제나 새롭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다시 온 것’ ‘기억을 더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피사의 진짜 매력은 살짝 기대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물, 기울어짐이 주는 여유에 있을 것이다. 괜찮다. 조금쯤 달라져도, 기울어져도. 어쩌면 그게 피사답고, 인간답고, 여행다운 일이니까. 결국 우리 모두의 삶과 닮아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방향으로든 약간 기울어져 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독특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일찍이 지드래곤께서 노래하셨다. 삐딱하게, 오늘밤은 삐딱하게. 삐뚤어진 탑처럼, 불완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멋지다. 우리 모두 삐딱하게!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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