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섭의 은퇴와 마주 서기]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소통도 가능
오해와 갈등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
역지사지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해야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 거듭 탄생

 

서로 다른 관점을 나타내는 얼룩말 /픽사베이
서로 다른 관점을 나타내는 얼룩말 /픽사베이

사람들은 보는 관점이 다르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도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 하지만 내가 보는 대로 다른 사람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여기 얼룩말 사진이 있다. "이 얼룩말 무늬가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그려진 것일까요? 아니면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그려진 것일까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그 대답은 반반이다.

같은 질문을 백인과 흑인에게 물으면 그 대답은 더욱 선명하게 갈린다. 백인들은 ‘흰 바탕에 검은 무늬’라고 말하고, 흑인들은 ‘검은 바탕에 흰 무늬’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황인종이 반반으로 대답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자칫하면 큰 혼란을 줄 수도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오해와 갈등이 생긴다. 오해는 저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나와 같지 않으니 같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 따돌릴 수도 있다. 여기서 갈등이 생긴다.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다 보면 큰 싸움을 벌일 수도 있다.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조금만 바꾸어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말할까?’ 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바탕에는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전제 없이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해는 갈등을 불러온다. /픽사베이
오해는 갈등을 불러온다. /픽사베이

오해가 생기면 당연히 갈등이 따라온다.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니 서로가 안 맞다고 느낀다. 갈등의 한자 어원을 따져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갈등(葛藤)의 갈(葛)자는 칡 갈 자이다. 등의 등(藤)자는 등나무 등자이다. 두 식물이 다 뭔가 대상을 타고 감아 올라가는 특성이 있다.

칡넝쿨은 시계 돌아가는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고, 등나무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그러니 이 둘이 만나면 서로 엉키고 꼬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언제나 풀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생각을 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식물이니 어쩔 수 없다. 역지사지로 상대편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의식 자체가 없는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소통이 이루어진다. /픽사베이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할 때 소통이 이루어진다. /픽사베이

사람은 다르다. 생각은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려 볼 줄 아는 의식을 가졌다.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한 발짝씩 물러나 타협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 나만이 전부이며 나만이 항상 옳다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나는 맞고 저 사람은 틀리다’라는 전제에서 한 번 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해결의 열쇠가 소통이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다. 뭐든지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다. 때로 의견이 달라서 화도 내고 충돌도 하지만 한 발짝 물러나서 보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 조금은 기질이 달라 참지 못하고 금방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조절하면 된다. 화가 나면 긴 호흡을 몇 번만 해도 화가 가라앉고 풀리기도 한다.

나만이 전부이며 나만이 항상 옳다는 아집을 버려야 다 함께하는 성숙한 사회로 거듭날 수 있다. /픽사베이
나만이 전부이며 나만이 항상 옳다는 아집을 버려야 다 함께하는 성숙한 사회로 거듭날 수 있다. /픽사베이

소통도 기술이다. 대화는 상대가 있고 각각의 입장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각각의 개성도 있고 자라온 환경과 문화적 배경도 있다. 백인과 흑인이 얼룩말을 보고 극심한 편향을 가졌듯, 자신들의 신체적 영향, 자라온 환경과 문화적 경험은 그 생각을 고착할 수도 있다. 다름을 이해하고 입장 바꿔 상대를 헤아려 보고 소통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소통은 또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질 때 가능하다. 요즘 우리는 많은 혼란 속에 살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적대시하고 서로 인정하지 않아 골이 깊어지고 있다. 편향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편향적인 알고리즘에 빠져 좌우로 갈라져 있다. 이제라도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화해와 소통의 노력으로 관계를 재정립해야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여성경제신문 박종섭 은퇴생활 칼럼니스트 jsp10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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