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시부모님이 주신 거라며
과일·채소 싣고 온 딸에게
맛있는 집밥 해 먹였더니
'충전'되었단 문자가 왔다

여름에 수확하는 농산물은 풍요롭다. /게티이미지뱅크
여름에 수확하는 농산물은 풍요롭다. /게티이미지뱅크

나의 화요일은 휴무라 게으름을 피고 있으려니 잠시 들르겠다는 딸의 문자가 온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 방학을 끝낸 아이들이 드디어 개학을 했다. 오늘 막내까지 보내고 숨통이 트이는지 딸의 목소리가 상쾌하다. 집에 들어선 딸의 차에서 큰 박스가 두 개나 내려진다. 시부모님이 농사지어 보낸 온갖 과일과 채소들이다. 제철에 나온 싱싱한 것들이 선택되길 기다리다가 제풀에 시들고 늙어버렸다.

마트에 가면 상추 몇 장, 가지 몇 개도 비싼 가격표를 붙여 판매대에 올라와 있건만 여름철 시골은 먹거리 천지라 노인들만 있는 시골에선 처치 곤란이다. 빈 땅을 놀리면 벌받는다는 어른들의 자기암시로 뭐든지 심어놓고 고생을 사서 하신다.

탐스러운 열매와 채소를 보며 자식들에게 갖고 가라 할라치면 오가는 기름값으로 사 먹고 말지 싶고, 부쳐주려 해도 생물이라 요즘 같은 뜨거운 날엔 가다가 다 익어 백숙 꼴이 된다. 거기에 물러버린 여름 채소의 특유한 냄새는 오래도록 코에 배여 입맛을 잃게 한다. 특히 감자, 양파, 부추 같은 것은 더 심하다.

뜨거운 땡볕에 일하시는 부모님 생각해서 허투루 버리지 말고 시간 날 때 갖고 오라 했더니 딸은 친정엄마를 재활용 처리소장 대하듯 당당하다.

나 역시 마당에 이것저것 심어 놓은 것도 넘친다. 이것들을 어떻게 활용할까 머리 굴리다가 몇 가지 방법을 취하고 있다. 채소는 말려서 가루내기, 열매는 말리거나 갈아서 냉동하거나 주스를 만드는데 가루내기가 오래 보관도 되고 좋았다. 이렇게라도 해야 땡볕에서 애써 농사짓는 사돈에게 덜 미안하고 놀러 온 지인들에게도 나눠주면 다들 좋아한다.

딸의 전화를 받자마자 텃밭을 한 바퀴 돌았다. 꽈리고추 따서 찌고 부추 베어 겉절이하고 노각도 무치고 가지도 쪄서 찢어 조물조물 무쳐 냉국을 만들어놓았다. 딸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가지냉국을 들이마시더니 연신 맛있다며 아부를 떤다.

예전엔 부엌 한쪽에 자물쇠가 채워진 창고를 가리키며 ‘우리 집 비법이 들어 있는 비밀 창고에요’ ‘며느리도 몰라요’ 하며 특별한 제조 비법을 숨기더니 세상이 바뀌어 이제는 너도나도 비장의 레시피를 공개하며 자랑하는 세상이 되었다. 알고 보니 된장 한 술, 쌀뜨물 한 컵, 때론 화학조미료 같은 누구나 알고 있던 것이 비장의 재료였다.

요즘처럼 맛집이 넘치는 세상에 별스러운 요리야 찾아다니며 먹지만 여름철 흔한 재료는 여러 방송매체의 쉽디쉬운 레시피 한 개를 골라 따라 하며 요리 삼매경에 빠지곤 한다. 가끔 내가 한 요리에 손주들이 ‘할머니 엄지척!’을 해주면 최고의 요리사가 된 기분이다.

넘치는 재료에 슬슬 지쳐갈 때쯤이면 계절이 바뀌어 생산물도 바뀌고, 농산물이 귀한 겨울엔 여름에 말리고 얼려 둔 재료를 파먹는 재미도 있다. 겨울이 없다면 여름철 넘쳐나는 농산물의 소중함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계절이 있는 이 나라에 산다는 것도 축복인 셈이다.

집밥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충만한 기운을 준다. /게티이미지뱅크
집밥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충만한 기운을 준다. /게티이미지뱅크

밥만 먹고 바로 가야 한다며 설레발치는 딸에게 조금만 기다리라 하니 그새 소파에 기대어 얕은 코를 곤다. 새벽부터 학교가 다른 세 아이 등교를 차로 시켜야 하니 그 피곤함은 안 봐도 애잔하다.

갖고 온 재료들로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담고 토마토를 데쳐 갈아 주스를 만들어 작은 병 여러 개에 나눠 담아, 들고 온 박스에 다시 넣는다.

잠시 눈을 붙인 딸이 부스스 일어나 점심을 달란다. 아까 먹은 건 아침이라나···. 한심하게 바라보며 냉면을 삶아 비벼주니 뚝딱 먹고 일어서 나간다. 짧은 시간에 후다닥 해치운 뒷설거지를 하노라니 문자가 온다.

“지금 내 기분···친정을 다녀오면 ‘충만’이란 단어가 느껴져. 고급 영양밥에 에너지까지 충전되었으니 덕분에 또 열심히 뛰어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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