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의 살다보면2]
한 끼 해결 위해 동생들 데리고
품앗이 다니던 그 시절 이야기

우리 마을 풍산 벌엔 이른 새벽부터 저녁까지 트랙터 소리가 요란하다. 밭작물이 뿌리 내릴 때면 논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온갖 차례가 기다린다. 농기계 앞에도, 저수지 앞에도 제상이 차려진다. 올 한 해도 큰 우환 없이 풍년을 이루게 해 달라는 제사다. 논농사 짓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객꾼들도 들러 막걸리 한잔과 떡 한쪽을 얻어먹는다. 제관은 그해에 논물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이웃에 사는 언니들이랑 밥을 먹는데 대농을 하는 언니의 전화벨이 울린다. 며칠 전 그녀의 넓은 논에 기계가 들어가 논을 삶고 물을 대어 1차 작업이 끝났다.
“차례가 언제 오나 기다렸더니 내일 우리 논에 모 심는단다.“
기계화가 되고부터 논농사는 점심도 새참도 없는 입으로 짓는 농사가 되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하는 걸 보니 그 말이 실감 난다. 도시에서 살다 귀촌한 큰 언니가 밥을 먹다 말고 옛날을 회상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머슴을 많이 둔 지주였어. 모심기 하는 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잔칫집 같았지. 전날 아버지는 양조장 가서 막걸리를 배달시키고 어머니는 광에 저장해 둔 북어를 꺼냈어. 갖은 양념해서 큰 가마솥에 쪄서는 누런 기름종이에 한 개 한 개 둘둘 싸서 차곡차곡 쟁이셨지. 다음 날 모심고 돌아가는 일꾼들 손엔 노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어. 집에서 기다리는 식구들을 위해 반찬용 북어찜을 하나씩 싸 주신 거지.
오전 일이 끝나고 점심 먹을 때 나랑 나이가 비슷할 것 같은 소녀가 어린 두 동생을 데려와 같이 앉더라고. 머슴이 주방에 대고 소리쳤어. ‘웃발이(객꾼의 경상도 사투리) 두 상 들어간다.’ 나도 학교에서 막 돌아와 유모가 차려준 점심을 먹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쳤어. 째려보는 듯한 눈빛이 얼마나 두렵던지 얼른 방으로 들어갔지. 호호.“

내일 모심기 하는 작은 언니가 깔깔 웃으며 말을 받는다.
“호호호, 그 동네도 내가 있었네. 그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하여 땅 한 뙈기 없었어. 부모는 새벽부터 남의 집 품 팔러 나가시고 엄마 대신 살림 사느라 초등학교는 거의 결석하곤 했지. 내가 그래서 받침 있는 글자를 잘 못 쓰잖아. 호호.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린 나를 부잣집 모심는 논에 품앗이로 가라고 하더군.
오빠는 장애가 있어 일을 못 했어. 품 팔러 가는데 글쎄 동생들도 데리고 가래. 밥 한 끼 얻어 먹이라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 주인 여자는 어린 데다가 몽땅한 내 키를 보며 한심한 듯 혀를 차더라고.
‘아이고, 애가 무슨 일을 한다고··· 논에 빠지면 찾지도 못하겠네. 쯧쯧.’ 그러면서도 기다렸다가 논 밥이나 먹고 가라 하데. 나는 논으로 들어가 일렬로 선 사람들을 제치며 허리 한번 안 펴고 끝까지 해냈어. 그날 일을 얼마나 잘했던지 웃발이로 데려온 오빠와 동생들이 눈치 안 보고 고봉밥을 얻어먹었던 기억이 나네.
이후엔 조막만 한 게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여기저기 불려 다녔지. 내가 시집갈 때까지 오빠와 동생들을 악착같이 웃발이로 데리고 다녔어. 결혼하니 시집은 친정보다 더 못살아. 거기에 젊은 남편이 술병으로 죽고, 나를 쳐다보는 어린 자식들을 보며 슬퍼할 겨를이 없었어. 악착같이 일하니 일등 일꾼으로 소문이 나서 일이 막 들어와.
경운기도 몰고 트럭도 몰고 150센티도 안 되는 이 작은 키로 수박 상차(짐 싣기) 일을 몇 년이나 했다니깐. 호호호. (그 일은 너무 힘들어서 요즘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한다.) 돈이 모이면 땅을 사고 또 사고··· 그러다 보니 내가 부자가 되어 있더라고. 호호호."

각자 살아온 삶은 극명하게 달라도, 지금 내 앞에 보이는 풍경 속에 내가 주인공일 때가 있었다는 것을, 그 배역이 주인이든 무수리든 충실히 잘해 냈기에 지금 크게 웃을 수 있는 거겠지. 너무 아프고 힘들었던 인생의 쓴맛이 지나고 보니 사는 맛이었다는 (고) 채현국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이분들을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힘들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부도 많이 하시고 여유를 부리며 쉴 연세인데도 열정으로 봉사활동을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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