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숙 <엄마의 방> 연재 13화
수면제를 먹을 생각을 하기도 한 딸
혼자 찾은 한강의 새벽에 위로받아
폭력적으로 발전해 가는 치매 발작
칼로 쑤셔 죽이겠다며 난동과 협박
스카프를 엄마 목에 두르고 목 졸라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간병 살인 뉴스를 접했다. 뉴스에 알려지지 않은 동반자살이나 간병 살인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몇 년 전에도 유명 가수의 아버지가 치매 간병에 지쳐서 간병 살인을 하고 자살한 사례가 있었다.

간병 살인은 계획적 살인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겪은 것을 보면 우발적인 것이 많다고 본다. 간병 가족이 오랫동안 간병을 하다 보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나빠지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각만 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 특히 치매 시간이 나타난 치매 환자와 간병인의 욱한 감정이 부딪치면 그 순간 간병 살인이 가능하다.

앞으로는 치매 간병인의 살인이 점점, 아니 급속도로 나타날 수 있다. 지금 당장 치매 정책을 촘촘히 계획하지 않으면 이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본다. 치매는 특정인에게 오는 것도 아니어서 내 가족 누구나 치매 환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치매 환자를 돌볼 가족들도 늘어 날 것이다. 갑자기 다가온 치매에 환자도 가족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엄마의 치매로 내가 간병인이 된 뒤 나는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했다. 물론 경제활동도 멈추었다. 게다가 엄마의 치매가 내게 미치는 스트레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무리 말해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라는 말이 실감 난다. 가족들도 뭐가 힘들다는 거냐고 말한다. 내 몸이 아픈 것도 몸관리도 운동도 안 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면증인 나는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어 3개월에 한 번씩 심장 관리를 받으러 가면 90일분의 수면제를 받아왔다. 그리고 며칠씩 잠을 못 자면서도 수면제를 모아두었다. 더 고통스러워지면 다 먹으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고 엄마도 교인이어서 그것을 시행하지는 못했다. 내가 떠나면 엄마는 어찌할 것인가가 더 걱정이었다. 또 내 가족, 내 아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서 억눌렀다.

비 오는 날이면 엄마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 나도 모르게 우산을 쓰고 한강으로 나갔다. 비 오는 한강의 새벽은 정말 고요했다.

요양원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한강에 뛰어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사실 엄마의 치매 이전에도 형제들과의 갈등으로 빗속을 달려 한강으로 간 적이 있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게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설움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며 한강 가에 앉아 한없이 울다 보면 속이 좀 후련해지고 안정이 찾아오곤 했다.

엄마는 정신이 맑을 때는 수면제에 대해 물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수면제, 같이 나눠 먹으면 죽지 않을까?”

“엄마 딸을 범죄자 만들고 싶어요? 동생들에겐 살인자 누나, 아들에겐 살인자 엄마가 되게 하려고요?”

“그럼 네가 이렇게 힘들고 내가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죽지? 내가 죽어야 끝나는데…….”

“엄마가 죽지 않아도 돼요. 엄마가 정신 줄만 놓지 않으면 돼요. 지금처럼 맑은 정신이면 아무 일 없어요. 그런 예전처럼 아들들하고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드시러 다니고 얼마나 좋아요.”

정신이 맑은 시간이면 대화도 진지해지고 엄마는 희망적인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맑은 정신으로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나 요양원 절대 안 가. 아무리 나를 끌고 가도 안 간다고. 네가 그랬잖아. 큰 애가 보내겠다고 하면 요양원 차가 와서 날 데려갈 거라고!”

“내가 언제요? 난 엄마 요양원 안 보내려고 이사까지 왔는데.”

“고모네 사돈어른들도 둘 다 요양원에 있는데 그러더란다. 밥도 비벼서 두 노인네 함께 먹으라고 하고, 밥에 수면제를 섞는다고. 그러니까 나는 내 집에서 편히 죽을 거야. 너희 당숙 부부도 요양원 가서 두 달 만에 죽었잖아. 두 노인네가 넓은 집에서 오순도순 살았으면 지금도 살아 있었을 거야.”

엄마는 요양원에 가는 것은 사람대접을 못 받는 것이고, 들어가면 죽는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너도 전에 뉴스에서 봤지? 손이랑 발 묶어놔서 요양원에 불나도 도망을 못 가고 다 타죽었잖아.”

요양원에 대한 노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시설이 좋지 않은 요양원이 뉴스에 나오는 것과 관련이 깊었다. 그리고 일부 요양원 시설에서 발생하는 나쁜 사례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큰 문제였다.

엄마의 치매 발작은 예전과 달리 예민하고 폭력적으로 발전해 갔다. 전에는 치매 발작을 해도 혼자 집 안의 물건들을 옮기거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고 가방을 싸는 게 전부였다. 새벽이면 혼자 비틀대며 돌아다니다가 넘어지면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리곤 했다.

그런데 쿵쿵 소리가 나서 올라가 보면 엄마의 눈빛이 변해있었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욕설을 하고 죽여버린다며 식칼을 휘둘렀다. 영화에서 보던 빙의된 모습과 같았다.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괴력을 발휘해 나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이러다가는 나도 엄마도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네년이 날 죽일 생각으로 음식에 독 탔지?”

“내가 엄마한테 왜 독을 드시게 해요.”

엄마를 진정시킬 방법이 없어 한동안 드리지 않았던 수면제를 한 알 드렸다. 잠을 자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약을 내미는 내 손을 물고는 밀어버려서 문갑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내가 쓰러지자 엄마는 다시 일어나 칼로 쑤셔 죽이겠다며 난동을 부렸다. 손을 묶으려 했지만 내 팔을 물어버렸다.

정말 내 엄마가 아니었다. 마귀의 행동이었다. 왜 요양원에서 팔다리를 묶어두는지 이해가 됐다. 이렇게 심하게 치매 증상이 나타난 게 두세 번째였던 것 같다. 엄마는 괴력으로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난동을 피웠다. 엄마의 흥분에 내 몸은 땀범벅이 되고 나도 같이 흥분했다.

힘이나 말로 제지가 안 되어 손목에 스카프를 묶으니 잠깐 사이에 풀어버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묶으려던 스카프를 엄마 목에 둘렀다. 그러고는 몇 번 두른 뒤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엄마가 하얗게 질려 캑캑거렸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뭘 하고 있나 아찔했다. 나는 엄마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실크 스카프여서 목이 완전히 졸리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참 울다 보니 엄마가 조용했다. 엄마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놀라 울음을 그치고 엄마를 흔들어 보았다. 그런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엄마는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당시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나는 엄마를 살해할 뻔했다.

나는 그즈음 최악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데다 몸도 아파서 세상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몸도 마음도 편안해지고 싶었다. 내가 간병살인자가 될 수 있는 위기에서 바로 찾아간 곳은 신경정신과였다.

원장님은 과도한 스트레스와 내 몸이 감당 못 할 건강 악화라는 진단을 내렸다. 정말 면역력도 바닥나고 인내심도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원장님은 신경안정제를 더 처방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가 의지하거나 엄마를 대신 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힘들어하지 말고 요양원으로 보내라는 동생들의 말이 서운하기만 했다. 나는 어쨌든 엄마의 목을 졸랐고, 간병살인자가 될 뻔했다.

치매 간병을 하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이런 일을 벌일 수도 있다고 본다. 나 역시 내가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 간병 살인은 잠깐의 실수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살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간병 살인은 순간이다.

나는 엄마를 해칠 뻔했던 내 행동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동생들은 왜 엄마를 요양원에 안 보내고 힘들다고 하느냐며 나를 탓했다. 나는 엄마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살게 하는 것이 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 스스로 거부감 없이 요양원에 갈 수 있어야 자신이 버려지거나 감금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잘 적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시설이 좋은 요양원 이야기를 했다.

내게는 엄마의 인격도 중요했다. 그리고 조부모님에게서 이어져 내려온 유교 정신이 내 머리 깊숙이 박혀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나는 장녀니까 아빠 없는 현실에서는 당연히 엄마와 동생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를 살해할 뻔한 그 위험한 시기에 나는 지옥 같은 진흙 늪 속에서 발버둥 치는 꼴이었다.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 채 썩어가고 있었다. 몸이 너무너무 아플 때는 세 살 아이의 손길이라도 필요했다. 몸도 마음도 다 부서져 영혼마저 떠나간 것 같았다.

내게는 태양도 달빛도 없었다. 예전 생활이 간절히 그리웠다. 봄이면 작업실 창가에서 계절을 느끼고 한강 주변에 푸릇푸릇 피어나는 새싹들을 여유롭게 바라보던 그때가 그리웠다. 넓은 창으로 보이는 한강과 국회의사당 쪽의 벚꽃과 한강의 불꽃놀이가 내게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 작업실을 스카이라운지라고 불렀다. 지금 내게는 그 시절이 지난 기억이 되고 말았다. 전에 살던 집 창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위로를 받아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선생님, 빨리 올라와 보세요.”

요양보호사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헐레벌떡 뛰어 올라가니 요양보호사가 칼을 쥐고 안방에 서 있었다.

“청소하는데 침대 머리맡에 식칼이 있지 뭐예요.”

정말이지 허탈하고 기운이 쭉 빠졌다.

“왜 칼이 여기 있느냐고 했더니 선생님을 죽이려고 숨겨놨다네요. 이게 무슨 일이래요?”

나는 응접실로 나와 엄마가 있었던 일을 요양보호사에게 얘기해줬다.

“전에는 그렇게 폭력적인 행동은 없었잖아요. 식겁했겠네요. 요양원에 가실 때가 된 것 같네요.”

“그러게요. 이제 너무 힘드네요.”

“며칠 전부터는 인지 공부도 안 하시려 하고, 운동도 싫어하고, 무슨 얘기를 해도 반응도 안 하시고 짜증만 내셨어요.”

표지 /창해
표지 /창해

엄마는 요양원에 안 가고 차라리 굶어 죽겠다며 식사도 별로 안 했다고 한다. 엄마의 폭력이 내게 더 심했던 것은 곁에 함께 있고 요양원 얘기도 내가 가장 많이 해서인 것 같았다. 엄마가 밀쳐서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에 혹도 나고 아팠지만 내가 참아내야 할 문제였다. 아들들도 요양원 얘기를 하면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 있어”하고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와 요양보호사는 며칠간 엄마 기분을 좋게 하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고, 엄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부침개와 잡채를 해달라고 했다. 엄마가 잡채를 좋아해서 항상 당면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원할 때 빨리 음식을 해낼 수 있었다. 많이 먹고 싶었던지 엄마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는 이후로 다시는 폭력적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기분 좋을 때 내가 엄마에게 했던 행동을 이야기하면 자기 행동도 기억 못 하고 나를 안쓰럽다고만 했다.

 

※ 위 이야기는 유현숙의 <엄마의 방>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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