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의 성과 인권]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저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당사국은 부모(또는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 법정 후견인 또는 아동에 대한 법적 책임자들)가 아동 양육에 있어 아동의 능력 발달에 상용하는 방법을 적용해 양육할 책임과 권리 및 의무를 가진다.’ -유엔아동권리협약 5조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영화 '가버나움' 포스터 

“자인, 너 몇 살이니?“ “전 몰라요.” “저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왜 부모를 고소하죠?” “나를 태어나게 해서요.”

영화 속 깡마르고 남루한 옷을 입은 자인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인은 열두 살 정도로 추정되는 아이입니다. 부모가 출생등록을 하지도 않았고, 자식의 생일조차 모르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인의 부모처럼 무지하다는 핑계로 또는 내 삶이 고단해 양육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이행자의 역할을 저버린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요? 어쩌다 태어나고 보니 나를 돌보지 않는 부모이고, 국가조차 나를 방치한다면 그 속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영화『가버나움』은 그 비참한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가버나움』은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가버나움’이란 ‘가파르나움’이라고도 쓰이는데, 예수가 멸망을 예고한 혼돈의 성경 속 마을이다. 감독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아동인권의 현실을 알리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시리아 난민과 불법체류자로, 자신들이 경험하는 문제를 영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해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자인의 부모는 자식이 너무 많고 그들을 돌볼 능력도 없으며 책임감도 없다. 자인과 동생들은 학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갓난아이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기둥에 발을 묶어 놓는가 하면 가짜 처방전으로 약을 사 모으고, 그 약을 탄 주스를 팔고, 가스통을 나르고, 슈퍼마켓에서 일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고된 노동을 해야 동생들과 먹고살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한 살 아래인 여동생 사하르가 이불에 피를 묻혀 놓은 것을 발견한다. 사하르가 초경을 하면 부모가 동생을 팔아넘길 것으로 생각한 자인은 동생의 생리를 숨기고 동생과 도망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하고 동생은 닭 몇 마리에 슈퍼마켓 주인에게 팔려 가게 된다.

분노하며 집을 나온 자인은 불법 체류 여성인 라힐과 라힐의 딸 요나스를 만난다. 언제 잡힐지 모를 불안한 상황에서 라힐은 자인을 집으로 데리고 온다. 라일이 일을 나가면 자인은 요나스를 돌보며 모처럼 가족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라힐은 불법체류자로 잡힌다. 자인은 오롯이 한 살인 요나스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자인은 여동생이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하게 돼 출혈이 있었고, 병원에 갔으나 출생등록이 되지 않아 제때 치료받을 수 없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인은 동생의 남편을 찾아가 칼로 찌르고 소년원에 가게 된다.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인내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의 삶이 너무나 가여웠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자인은 한 번도 교육받지 못했고,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아이다. 그러나 자인은 자신보다 약자인 사하르와 아기 요나스를 최선을 다해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집을 나온 자인은 불법 체류 여성인 라힐과 라힐의 딸 요나스를 만난다. 자인은 요나스를 돌보며 모처럼 가족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라힐은 불법체류자로 잡힌다. 자인은 한 살인 요나스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집을 나온 자인은 불법 체류 여성인 라힐과 라힐의 딸 요나스를 만난다. 자인은 요나스를 돌보며 모처럼 가족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마저 오래가지 못하고 라힐은 불법체류자로 잡힌다. 자인은 한 살인 요나스를 돌보는 처지가 된다. 영화 '가버나움' 스틸 컷 

그러나 자인의 부모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나도 피해자다’ ‘내가 좋은 부모를 만났다면 자식을 이렇게 키우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 정말 자식보다 못한 부모가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영화 속에서 아동은 매매혼, 아동 노동착취, 난민 문제, 미혼모 문제, 여성 차별, 출생등록, 빈곤 문제 등 온갖 사회 문제 속에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아동이 누릴 최소한의 기본권(건강과 안전하게 살 권리,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교육받고 복지혜택을 누릴 권리,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상태다.

부모는 자녀를 책임지지 않았고, 국가는 차별과 폭력을 외면하면서 그 속에서 약자인 아동들은 지옥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세상에 존재조차 증명받지 못한 아이들, 매일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늪 속에 빠진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등록돼야 하며, 출생 시부터 이름을 갖고 국적을 취득하며 가능한 한 부모를 알고 부모의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7조 1항

그렇다면『가버나움』은 지구의 한 곳에서 일어나는,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까? ‘대한민국의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나의 주변에 ‘가버나움의 자인’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 한국에도 ‘가버나움의 자인, 사하르, 요나스’처럼 ‘살아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엔 미등록 이주 아동이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 부모가 고의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등록되지 않은 아동이 2020년에 4000명 정도 된다는 발표도 있다. 적절한 치료, 교육, 사회복지 등에서 배제와 차별을 겪고 있고, 아동학대나 사고로 사망한다 해도 이들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유령 아동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국적이 어디든,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든 간에 이들 모두는 등록되고 보호받아야 할 권리의 주체다.

자인은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를 보인다. 영화의 결말에 처음으로 웃는 자인의 미소와 사회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용기에 희망을 걸어 본다. 국가와 양육자가 의무이행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때 그 상황을 영화 속 자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사는 게 개똥 같아요. 내 신발보다 더러워요. 지옥 같은 삶이에요. 통닭처럼 불 속에서 구워지고 있어요.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

아동의 권리를 존중·보호·이행할 의무이행자의 능력이 개발돼야 하고 아동은 양육자, 보호자, 지역사회 구성원의 지도와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 일반논평 제13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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