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익종의 삶이 취미, 취미가 삶](4)
걷기 예찬론을 펼치는 이유
걷기는 기본으로 '함께' 개념

단적으로 어떤 취미가 좋은 취미이고, 어떤 취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을 가늠하는 것은 다양한 인간성과 그에 따른 개인적 성향을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바람직한 취미를 추천하라고 한다면 그 취미가 지속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인가와 그 취미생활이 개인의 행복에 기여해야(취미가 고역인 것이 있을까 마는~~ 그런데, 놀랍게도 있다) 함을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지나칠 정도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취미생활을 해 보았다. 아내의 표현대로라면 진정한 취미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어떤 취미가 제일 좋았을까? 평생 해 보았던 수 많은 취미생활 중 으뜸은 걷기이다(걷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아니 이 세상에 걷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고, 걷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인데 그게 어떻게 취미생활이 되느냐고 항변한다면 어떤 말을 해 줄 것인가까지 생각해 놓은 필자로서는 논문을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대답을 갖고 있다.

차마고도길을 걷다 옥룡설산을 바라보는 필자와 일행. 걷기보다 좋은 취미는 없는 것 같다. /사진=한익종
차마고도길을 걷다 옥룡설산을 바라보는 필자와 일행. 걷기보다 좋은 취미는 없는 것 같다. /사진=한익종

 

걷기가 최고의 취미라고 웅변하는 대표적 이유는 취미가 삶이고, 삶이 곧 취미생활이 돼야 한다는 나의 주장과 걷기를 하지 않으면 인간의 삶 자체가 위협을 받으니 그를 차라리 즐기는 취미로 삼자는 내 생각에서다.

또 걷기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시켜 온 역사와 같고, 앞으로 그를 소홀히 하면 인류는 퇴락할 수밖에 없으니 차라리 즐기자는 것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통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그런데 인류는 인간을 더 편안하게 하기 위한 발명과 그에 따른 직립보행의 소홀함이 인간을 더욱 위태하게 만든 아이러니와 불편함을 겪더라도 걸을 것인가 아니면 편안함을 쫓을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편의성, 안락함, 호화로움의 추구는 탈것이라는 이기(利器)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제 인간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흉기(?)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위 인간을 더욱 진화시키고자 한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의 올림픽 슬로건이 인간을 퇴화시키는 원인이 된 것이다. 단적인 예가 걷기를 소홀히 한 남성은 당뇨병에, 여성은 유방암에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이다.

내가 걷기 예찬론을 펼치며 최고의 취미생활이라고 극찬하는 이유치고는 조금 이율배반적이다. 취미가 즐거움이라면서 살기 위해 억지로 걸으라는 주문으로 들릴 수 있기에 말이다. 걷기를 취미 생활로 강조하기 위해 먼저 협박성(?) 발언을 했다고 이해해 주시길···.

이제 건강을 위한 마지못한 수단으로서 필요성을 넘어 나의 걷기 예찬론의 이론적 배경(?)으로서 걷기의 취미에 대해 얘기해 보자.

나는 걷기를 `발로 생각하고 머리로 걷는다’로 표현하곤 한다. 걷기는 발로 걷지만 걸음 걸음에 수 많은 사고와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걸음 걸음에 잡다한 번민과 잡념이 떨구어져 나간다. 한적한 숲길, 호젓한 바닷가를 걸어보아라. 거기에 무슨 잡념이 있을 수 있나 말이다. 동네 어귀를, 출퇴근시 거리를 조금 늘려 걸어 보아라. 변화하는 세태를 느낄 수 있고 각종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걷기는 느림이다. 탈 것을 타고 빛의 속도로 지나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느림은 많은 정보와 볼 것을 제공한다. 빠르게 이동함은 많은 것을 놓친다. 주마간산이라 했다. 말을 타고 가면서 훑어보는 것을 비판했던 옛 선조가 오늘을 봤다면 아마 빛의 속도로 과거로 돌아가자고 했을 듯하다. `에이~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고--?’ 하고.

걷기는 남과의 비교를 거부한다. 인간사 모든 불상사는 남과 비교해 더 많이, 더 호화롭게, 더 잘나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서 야기된다. 달리기와 오르기와는 달리, 걷기는 비교평가를 거부한다. 여유자적하는 사람이 비교우위를 위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다. (물론 일부 종주 트래킹 등은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손자와 함께 저지오름 둘레길을 걷는 필자. 걷기는 `함께'를 전제로 한다. 대상이건 자아건. /사진=한익종
손자와 함께 저지오름 둘레길을 걷는 필자. 걷기는 `함께'를 전제로 한다. 대상이건 자아건. /사진=한익종

걷기 예찬론에는 끝이 없다. 그러나 한마디 더 하자. 걷기는 `함께’를 전제로 한다. 비록 혼자 걷는다 해도 거기에는 자기자신이 있다. 내재된 자아라고나 할까? 걷기는 함께하는 대상에 대해 이해와 배려, 서로 간의 갈등해소,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의 공유 등을 가능케 한다. 그렇기에 부부관계에서는 특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래저래 걷기는 실보다는 득이 많은 취미활동이다. 거기에, 인생 후반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강조하는, `돈 쓰는 취미는 이제 줄여가라’는 내 강의를 완벽하게 실천하는 방법 중에 걷기보다 좋은 취미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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