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익종의 삶이 취미, 취미가 삶] (1)
성취가 목적인 삶에 갇혀 살아온 우리
소풍 온 사람처럼 오늘을 즐기며 살자

오래전, 어느 방송의 유명 앵커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라는 책을 냈다가 호되게 욕을 먹은 적이 있었다. 성스런 방송이란 직업을 평가절하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어떤 이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냈다가 유학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역시 성스러운 위인이신 공자를 폄훼하는 제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삐에로 상과 함께 한 필자./사진=한익종
삐에로 상과 함께 한 필자./사진=한익종

나 또한 `삶이 취미, 취미가 삶’이란 칼럼으로 심한 비난을 받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 비난을 비난해 보자라는 의도에서, 성스러운 삶을 취미로 격하시킬(?) 요량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비난을 감내하면서까지 `삶이 곧 취미요 취미가 곧 삶’이라고 부르짖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의 주인공, 공자의 말씀을 인용해 보자.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못 당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딱, 이 말이 내 말이다. 가장 성스럽고 위대한 삶이 좋아하지 않고 즐기지 않는 삶이라면 그 삶은 도대체 왜 중요할까? 즐기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인생 2막(직장생활)을 마치고 인생 3막을 살아가면서 더욱 확신이 서는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인간은 지구별에 소풍 온 소풍객이다'라는 표현으로 인생을 미화한다.

소풍 온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 표현 그대로 우리가 살다 떠나는 지구에서 온전히 즐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가야 하는 모습 아닌가.   

즐기다 가자!

그러나 정작 우리네 삶은 어떤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보다 잘 살아야 하고, 남보다 나아 보여야 한다는 투쟁적 삶을 살다 가지는 않는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삶을 낙타와 같은 삶, 사자와 같은 삶, 어린아이와 같은 삶으로 은유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낙타와 같은 삶(청소년기), 사자와 같이 투쟁적이고 경쟁적인 삶(직장생활 즉 돈·명예·지위를 추구하는 삶),  은퇴 후의 삶인 'The Third Generation(제 3세대)'은 어린아이와  같은 삶?  내가 주창하는 인생 3막론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특히 직장생활이라는 업을 거친 사람은 니체가 은유한 그러한 삶의 단계, 즉 낙타와 같은 삶, 사자와 같은 삶을 거친다. 그게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오랜 기간 숙련(?)이 돼서 그런지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면서도 끝까지 인생 전반부의 가치에 함몰돼, 인생을 허무하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인생 3막은 어린아이와 같이 즐겁고 순진무구한 삶, 인생의 본질적 의미를 즐기는 시간이 돼야 하지 않을까?  취미생활과 같은 삶 말이다. 만일 취미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 남과 경쟁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취미생활을 고역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취미를 즐기지 않고 대충 시간 때우기로 하는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지구로 즐기러 온 소풍객이 삶을 즐기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삶이 취미가 되고 취미가 삶이 돼야 하는 이유다.

제주가 내려와 필자가 꾸민 놀이터이자 일터 알나만 전경. 이곳에서 환경보호와 봉사, 창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강조하고 있다. /사진=한익종
제주가 내려와 필자가 꾸민 놀이터이자 일터 알나만 전경. 이곳에서 환경보호와 봉사, 창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미래세대에게 강조하고 있다. /사진=한익종

내 글을 읽고, 내 강의를 듣는 사람은 대부분 중년 이상의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내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다. 즐거운 인생, 행복한 삶을 추구하면서도 왜 우리는 끝까지 낙타와 사자와 같은 삶을 지향할까?

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민족 동란 이후 무참하게 파괴된 현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전후 세대의 머릿속에는 `목표지향적 삶’이 지선극미한 삶이라는 가치가 인처럼 배겨 있다. 이런 가치는 모든 사고와 행동을 목적 달성이라는 욕구에 경도시켜서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는 삶을 당연시 여기게 했고, 그런 자세가 바람직한 삶의 근본이라는 데 세뇌돼 있다.

지금 고생하는 건 내일 잘 살기 위함이다라는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과정경시형 삶이 되기 마련이다. 과정을 경시(?)하는 풍토는 정작 삶의 중요한 가치인 '인생의 전반적 행복상'(부분적 행복감이 아닌)을 상실케 한다.

목적을 위해서, 목표달성을 위해서 오늘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자세는 필연적으로 오늘을 고되고 재미없게 만든다(물론 개중에는 그것조차 행복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내가 사는 지금은 소풍지가 아니라 소풍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고난의 길이며 취미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만든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정상에서 만세를 부르기 위해 죽자사자 올랐는데 곧 하산해야  하는 현실, 산에 오르는 여정은 오직 고통스러운 과정에 지나지 않는 등정이 과연 올바른 취미일까? 내일 제대로 된 취미생활을 위해 오늘은 참는다고? 지금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이 다음에 똑같이 하고 싶은 일이 된다고? 누가 내일을 보장하나.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기라는 말은 바로 과정중시형 사고에서 시작된다. 삶의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메멘토 모리는 바로 오늘을 잘 살자는 웅변으로부터 시작된다. 잘 죽자(well dying)라는 얘기는 잘 살자는 얘기의 연장선이다. 잘 살자는 곧 잘 즐기자라는 얘기다.

잘 놀다 간다라는 유언을 남긴 천상병 시인이 부럽다.  지구별에 소풍 온 진정한 소풍객이 자리를 뜨기 전 하는 말이 아닌가?  삶은 삶이고, 취미는 취미라는 생각을 가진, 단조로운 여러 삶들을 유심히 지켜봐 왔다.

결국은 삶도, 취미생활도 제대로 못 해 보고 지구별을 떠나가더라. 행복한 삶, 즐거운 삶을 원하는가? 삶이 곧 취미요, 취미가 곧 삶이라는 자세를 갖기를 권한다. 필자와 함께 삶이 취미가 되는 여정을 함께 할 준비가 됐다면 함께 떠나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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