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 태어난 손주는 다음 해 3월 어린이집에 입학했다. 채 걷지도 못할 때였다. 적응 기간 한 달 동안 첫 주는 1시간, 둘째 주는 2시간, 이런 식으로 집 떠난 생활에 적응해 갔다.보내고 돌아와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데리러 가는 지경이었지만 들여보내고 오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의 사내아이 셋이 같은 반이었다. 등원 시간이면 어린이집 정문이 ‘통곡의 문’이 된다는데, 손주는 울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적응을 잘했다.살아가는 데 신조가 많은 편인데, 무슨 일이든 ‘처음 일주일이 힘들다’는 것도 나의 신조다. 게
전업주부였거나 직업을 가지고 있었거나, 여자 나이 쉰을 넘으면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한숨 돌리는 시기가 온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 늦게까지 경제활동을 하는 경우도 예전보다 많아졌으나, 그것은 참으로 복 받은 경우인 것 같다.개인적으로 경제적인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자, 여자를 떠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제 앞가림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떳떳하다. 평생 일을 놓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일을 하며 두 딸을 키울 때,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힘들 때가 있었다. 매인 몸이라는 답답함이었다.30여 년
손주는 입이 짧았다. 분유만 먹는 신생아 때에는 그래도 제 양을 다 먹고 젖살도 포동포동하더니 이유식을 먹으면서부터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먹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이라 입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먹으려는 게 걱정인데 손주는 음식에 낯가림이 심했다.살림을 거의 예술 수준으로 하는 젊은 엄마들을 보면 이유식도 갖은 재료와 현란한 방법으로 만들어 냉동실에 쟁여 놓고 먹이던데 할머니의 구식 조리법이 입에 맞지 않는 건지 찌고 삶아서 으깨는 게 고작인 이유식은 내가 먹어봐도 사실 맛이 없었다.그래도 두 딸은 그걸 열심히
어린이집과 유치원 생활은 교육보다는 체험과 놀이가 주된 과정인 것 같다. 아이들도 행사를 통해 협동심과 규칙 지키기, 창의력 등을 함께 배워나간다.손주의 등원 첫해는 우왕좌왕, 알림장 내용을 봐도 모르는 게 많아서 선생님들께 묻고 등·하원할 때 만나는 딸뻘 엄마들한테 도움을 받고는 했다. 그것도 2~3년 차로 접어드니 노하우랄까 경험이 쌓여 수월해졌다.특별히 챙겨 보내는 준비물이 많지 않았고, 도시락을 싸 보내야 하는 소풍이 1년에 두어 번, 물놀이할 때의 수영복과 숲 탐험의 모자 정도였다. 두 딸을 키울 때는 챙겨야 하는 준비물과
주위에 가까운 사람이 손주를 키우는 일이 없어 유튜브나 책 같은 걸 찾아보며 이런저런 육아 공부를 한다. 친구들도 예전의 모임에서는 “손주 봐주지 말자!” “애 본 공은 없다”며 한껏 떠들더니 막상 내가 손주를 보기 시작하자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다. 몇몇이 손주를 보았지만, 어찌어찌 키우는지 나같이 전담으로 양육하는 경우는 드문 듯하다.물론 손주야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지만, 내 자식의 자식이다 보니 ‘내 마음대로’ 키울 수는 없다. 사람마다 생각이 제각각이고, 세대 차이도 있을 터이니 ‘이것이 맞는 건가···’ 싶을 때도
적령기가 되어도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며 인구학자가 아니라도 조금 걱정은 된다. 혼자 사는 가구가 전체 가구의 반이 되어 간다니 이러다 정말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지···. 제 한 몸 건사하며 살기도 벅찬 경제 상황이라니, 이유는 안 하는 것과 못 하는 것 둘 다이지 싶다.지나고 보니, 때 되면 가야 하나 보다 생각했던 게 맞는 일도 아닌 것 같고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는 말도, 그 자식이 듣기에는 설득력이 없다. 우리 집도 둘째 딸은 미혼이다. 내가 보기에 결혼할 생각도 없고 계획도 없고 기미도 없다. 그
아이가 말을 배워 가는 과정은 참으로 경이롭다. 옹알이부터가 시작이다. 첫아이의 옹알이를 보고 엄마가 느끼는 환희와 기쁨은 육아의 모든 고단함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모두 수다쟁이가 된다. 아이가 듣건 말건, 보건 말건, 계속 말을 하면서 대화를 시도한다.어느 날, 아기가 엄마와 눈을 맞추면서 입술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엄마 말이 끝나면 무슨 소리를 내고, 또 엄마 말이 끝나면 반응을 한다. '주거니 받거니'를 하게 된다. 처음에는 의심스럽기도 하다. ‘우연히 낸 소리인가?’서너 번 반복하다 보면 본능적으
딸의 결혼 후 1년 반이 지났을 무렵 임신 소식을 들었다. 각자의 일로 너무나 바쁜 딸 부부인지라 애를 언제쯤 낳을 거냐고 물어본 기억은 없다. 예전과 달리 자식들의 결혼도 저희가 알아서 결정하고, 출산도 다 자유 의지이니 해라, 말아라, 낳아라, 언제 낳느냐 그러는 부모는 드물어졌다.낳으면 키워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아기가 생겼다는 말에 왠지 놀랐다. 95%쯤은 너무나 기뻤고, 아주 약간 순간적으로 걱정도 스쳤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함께 엄마의 길로 들어선 딸의
두 딸을 키울 때는 ‘어떻게 놀아줄까’ 걱정해 본 기억이 없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차분했던 큰딸은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리고, 붙이고, 책을 읽으며 1초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동생이 생기자 그 동생을 데리고 또 만들고, 그리고, 붙이고, 설명했다. 지루한 기색도, 놀아달라는 투정도 없이 종일 재미있게 혼자 잘 놀았다.손주는 달랐다. 일단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TV 화면 같은 것에 잠깐 한눈을 팔 때도 있지만 그때도 몸은 뛰고 있었다. 낮잠에서 깰 때도 뒤척이는 법이 없다. ‘어이쿠! 왜 누워 있었지?’ 부리나케 일어나 놀잇감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불면증을 겪기 시작했다. 잠들기 힘든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설핏 자다 깨서 온밤을 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새벽 1~2시경에 거실에 다시 나와 멍하니 앉아 있노라면, 순리대로 착착 노화의 순서를 밟는 몸이 서글프면서도 이러다 다른 병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저런 약의 도움으로 잘 자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자기도 하면서 갱년기를 겨우겨우 지나고 있을 즈음··· 할머니의 황혼육아가 시작되었다.세상일이란 게 가장 적절한 시간과 상황에서 일어나 주지 않지만,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미국 체류는 한 달이었지만 가기 전 짐 싸기, 도착해서 짐 풀기, 귀국 전 집 정리 무엇 하나 만만하지 않았다. 아기 동반이라 줄일 수 있는 짐에 한계가 있었지만, 무거운 걸 들어줄 남자가 없으니 짐을 마냥 늘릴 수도 없었다. 이것도 필요할 것 같고, 혹시 모르니 저것도 넣어야 할 것 같고···.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지낼 집이 좋았다. 청소기가 없는 것이 의아할 뿐 가구나 식기는 만족스러웠다. 미국 집의 렌트 규정은 들어올 때와 똑같이 청소해 놓고 나가기다.주특기가 청소이므로 어려운 것은 없었지만 아이가 있다 보니 기저귀 같은 쓰레
한 달 동안 렌트했던 미국 집은 넓은 마당과 방, 욕실이 각각 두 개씩 있고 거실이 있는 전형적인 미국식 주택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갔던 큰애는 방학이면 여행을 다니느라, 주말이면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거의 집에서 생활할 일이 없었다. 그 와중에 받은 한 달 연수는 일인 동시에 휴가이면서, 공부인 동시에 매일 아기를 볼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 게다가 아침저녁으로 엄마 밥을 먹을 수 있다니··· 살림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딸아이로선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엄마가 해준 아침밥을 먹고 딸아이가 병원으로 출근하면, 나는
딸네가 아파트 옆 라인으로 이사 오기까지 3년 동안 딸은 주말에만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일도 워낙 바쁘고 오가는 거리도 있고 그러다 보니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에 와서 주말을 지내고 일요일 오후에 돌아가는 생활이 3년이었다.누워있는 신생아 때를 지나 앉고, 서고, 걸으며 옹알이에 이쁜 짓이 늘자, 애를 떼놓고 일을 위해 돌아가는 딸이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진과 동영상을 아무리 많이 찍어 보낸들 살을 부비고 눈을 맞추면서 제 손으로 키우는 것과 비교가 되겠는가.‘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저렇게 힘들게 일을 해야 하나···.’ 나도 그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다'는 속담이 나이가 들수록 지당한 말씀 같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비유나 군더더기 없는 은유까지 옛말은 깔끔하면서도 멋스럽다.눈이 오나 비가 오나···.이 여덟 글자를 참으로 좋아한다. 이러고 사는 이들의 인생을 관통하는 좌우명이다. 하찮은 핑계에 흔들리지 않고 작은 이익에 돌아서지 않는 무쇠 같은 각오가 있어야 가능하다.낳자마자 바로 할미네로 온 손자는 걷기도 전에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너무 이른 감은 있었지만 웨이팅이 길다는 소문과, 늦게 가면 적응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채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등원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시작한 직장생활 30여 년은 그야말로 일과 육아의 전쟁이었다. 지금처럼 어린이집이 많지도 않았고 시어머니나 친정엄마의 도움 없이는 직장 다니기가 힘든 시대였다. ‘경단녀’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왜 그리 일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지···. 애 둘을 끌고 이리저리··· 그야말로 동냥 육아를 하며 일을 하고 애들을 키웠다.착하고 순하면서 건강하기까지 한 두 딸 덕에 어찌어찌 은퇴를 하고, 그 시절이 너무 힘들고 싫어서 애들에게 일찌감치 선언해 두었다. “애 낳으면 엄마가 키워준다!” 결혼과 직장생활이 뭐 벌 받는
손자가 3년을 다닌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다도를 가르쳤다. 요즘은 차 마시는 사람이 드물어져 노인들이나 하는 걸로 알던 다도를 가르친다니 할미로서는 내심 반가웠으나 한 달에 한 번씩 한복을 입고 가는 걸 손주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옷이 불편한 건 뻔한 일이고 수업이 끝나면 갈아입을 옷을 들고 가는 일도 번거로워했다. 여자아이들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선녀풍 한복을 입고 댕기 머리에 조바위까지 쓰면서도 너무 즐겁고 행복한 낯빛이건만···.한복을 입혀 등원시키는 날은 아침부터 전쟁이었다.“꼭 입고 가야 돼?”“바지는 안 입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