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미의 할머니 육아]
직장생활 30여 년은 일과 육아의 전쟁
너무 힘들고 싫어서 일찌감치 선언했다
“애 낳으면 엄마가 키워준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시작한 직장생활 30여 년은 그야말로 일과 육아의 전쟁이었다. 지금처럼 어린이집이 많지도 않았고 시어머니나 친정엄마의 도움 없이는 직장 다니기가 힘든 시대였다. ‘경단녀’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 왜 그리 일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지···. 애 둘을 끌고 이리저리··· 그야말로 동냥 육아를 하며 일을 하고 애들을 키웠다.

착하고 순하면서 건강하기까지 한 두 딸 덕에 어찌어찌 은퇴를 하고, 그 시절이 너무 힘들고 싫어서 애들에게 일찌감치 선언해 두었다. “애 낳으면 엄마가 키워준다!” 결혼과 직장생활이 뭐 벌 받는 것도 아니고 엄마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지 않겠는가.

5월 말이 예정일이었던 딸의 만삭 배를 5월 초쯤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남산만 한 배'였다. 나도 애 둘을 낳았지만 저렇게 불렀을까 싶게 부푼 배를 보며 ‘한 달을 더 버틸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할머니가 되었다. /이수미
할머니가 되었다. /이수미

어린이날 하루 전,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어 태국 음식점에서 원플러스원 맥주를 한 모금쯤 마셨을 때 왠지 핸드폰이 보고 싶어졌다. 사위의 부재중 전화. ‘뭐지?’ 뭔가 싸한 느낌··· 지하에서 1층까지 어떻게 뛰어올라갔는지 기억도 없다.

“어머니! 양수 터졌대요.”

5시까지 근무를 하고 일어서는 순간, 그 남산만 한 배에서 손주가 나올 채비를 한 것이다.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려가니 딸은 벌써 진통이 시작되었다.

세상 모든 엄마들은 딸의 진통을 보기 힘들다. 30여 년 전, 나의 첫 진통이 시작됐을 때 떠오른 단어가 ‘원죄’였다. 아··· 이것이 출산의 고통이구나···. 역시 대단하신 하나님!

밤 12시를 넘긴 직후 어린이날에 손주가 태어나고, 나는 그렇게 할머니가 되었다. 예상한 일이었어도 느낌까지 예상대로는 아니었다. 손주를 품에 안았을 때 ‘어머··· 이게 웬일이야···.’ 황혼육아 8년 차지만 그 순간은 아직도 어느 별에서 날아온 어린 왕자를 만난 듯 얼떨떨한 순간이었다. 생일이 어린이날이니 선물 하나는 굳은 셈.

친구들은 지금도 얘기한다. 원플러스원을 원도 없이 못 먹어서 ‘원이 되었다’고···.

여성경제신문 이수미 전 ing생명 부지점장·어깨동무 기자 leesoomi7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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