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이의 아취 단상(雅趣 斷想)]
8월의 사물, 유기(鍮器)
재료들의 장점을 극대화한
보물 같은 그릇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든다’라는 입추가 지났다. 8월 중순에 가까워질수록 아침과 밤에는 공기가 제법 선선해진 걸 보니 한여름의 고비는 지난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낮에는 해가 뜨겁고 방학 중인 아이들과 붙어있으려니 자동으로 에어컨을 켜고 만다.
지난 한 달간 에어컨과 선풍기, 메밀국수, 수영과 백숙 등 여름 도우미들이 무더위 아래 우리 가족의 일상을 연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름 낮 특유의 지루함과 끈적임에서 나와 아이들을 구원해 주고 있는 건 바로 팥빙수이다.

날이 더울수록 아이들은 얼음물이나 아이스크림을 찾는 날이 많아졌는데, 좀 더 건강하고 맛있는 시원한 간식을 찾다 보니 빙수만 한 게 없었다. 하지만 요즘 물가가 물가인지라, 밖에서 빙수를 자주 사 먹을 수도 없고 결국 아담한 수동 빙수 기계를 하나 마련했다.
에어컨을 틀어놔도 늘어지는 여름 오후, 나는 아이들을 부른다. “빙수 먹을 사람?”
아이들은 손을 들고 “저요! 저요!” 하며 식탁으로 달려와서 빙수 기계에 얼음을 넣고 신나게 간다. 팥과 우유만 넣은 기본 중의 기본 팥빙수인데도 아이들은 세상 맛있게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그런데 이 빙수 먹을 때 쓰는 그릇과 숟가락이 요물이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 시어머니께서 아이들 쓰라고 선물로 주신 유기(鍮器), 바로 놋으로 만든 식기이다. 황금빛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고급 식기인 유기를 가격대가 높고 관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감히 써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선물을 받아보니 이쁘긴 이쁘다.
반짝이고 황금색인 건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아이들은 원래 화채를 담아 먹는 놋그릇의 영역을 그래놀라, 덮밥, 간식, 과일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두어 달 정도 쓰다 보니 듣던 것처럼 관리가 딱히 어렵지도 않고, 내친김에 우리 부부를 위한 놋그릇도 사볼까 하는 견물생심도 생긴다.
예로부터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대를 물려가며 사용해 왔다는 유기는 은은한 황금빛 때문에도 품위 있는 그릇으로 인기가 많았겠지만, 음식에 조금이라도 독성이 있으면 검게 변한다고 하니 안전을 담보해 주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열 보존율이 높아 보온이나 보랭 효과도 탁월하고,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등 다른 소재로 만든 그릇에 비해 비교 불가할 정도의 뛰어난 항균 능력 역시 여러 실험을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더 신기한 것은 유기의 재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을 섞는 비율이다. 현대 금속공학에 따르면 주석 비율이 10%를 넘어가면 구리합금이 잘 깨진다고 하는데, 녹인 쇳물로 바둑알같이 만든 둥근 덩어리를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가진 여러 사람이 망치로 펴서 형태를 만드는 방짜유기의 경우 주석의 비율은 22%나 된다. 이는 현대 금속공학의 법칙에 전혀 맞지 않는 비율이다.
청동기 시기부터 구리를 다뤄온 우리 선조들은 ‘주물(녹인 쇳물을 틀에 붓기)’ 단계에서 분리되었던 구리와 주석 조직들이 ‘압연(망치로 치고 압을 가하기)’ 단계를 지나면서 서로 눌리고 섞이면서 조직이 치밀해져 내구성을 향상할 경험치를 쌓았을 것이다. 이 경험치로 구리와 주석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공 방법을 찾아냈고, 그릇으로는 최고의 기능을 가진 황금빛의 유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기는 한자로 놋쇠 유(鍮)에 그릇 기(器)를 쓰는데, ‘유’ 자는 쇠 금(金)과 음을 나타내는 대답할 유(兪)가 합쳐진 형성자이다. 이 한자를 보고 있으니, 쇳물을 녹여 이리저리 두들기며 유기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재료에 끊임없이 질문했고, 재료는 결국 대답을 해주었다.
아이들이 빙수를 먹을 때 쓰는 그릇과 숟가락은 요물이 아니었다. 재료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질문하고 또 질문했던 장인들이 만들어 낸 보물이다.
여성경제신문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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