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이의 아취 단상(雅趣 斷想)]
6월의 사물, 부채
시원한 바람은 기본
다양한 이로움이 가득
바야흐로 여름이다.
이젠 6월이 여름에 속하는 달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더위는 일찍 찾아온다. 선풍기를 꺼내는 시기가 예전에 비해서 빨라진 건 확실하고, 6월 초에도 에어컨을 켜는 게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여름이 시작되는 달로 적격인 6월에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부채를 그려 레터프레스로 찍은 이유가.

6월 달력의 모델이 된 부채는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에 전시된 부채 중 ‘팔덕선(八德扇)’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부채이다. 전시장의 팔덕선은 부들잎을 엮어 만든 부채로 그 색이 연한 갈색과 황토색 사이를 띄고 있는데, 내가 만든 달력에는 더워지는 날씨에 눈이라도 시원하면 좋을 것 같아 하늘색을 넣었다.

팔덕선 옆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진 태극선(太極扇), 둥근 모양의 단선(둥글다 단團, 부채 선扇)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부채 모양에 따라 여덟 개의 각으로 이루어진 부채이면 팔덕선(八德扇)이 아니고 팔각선(八角扇)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아래에 있는 설명을 읽어보니 여덟 가지 기능이자 이로움(덕, 德)이 있다고 해서 팔덕선이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있었다.

부채의 여덟 가지 이로움이란 바람을 낼 수 있고, 습기를 없애고, 바닥에 깔 수 있고, 값이 싸고, 제작이 쉽고, 비를 피할 수 있고, 햇빛을 피할 수 있고, 독을 덮을 수 있다는 것인데, 팔덕선으로 검색을 해보니 내용이 조금 다른 것도 있었다.
모기나 파리를 후려쳐 잡을 수 있다거나 쓰레받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다소 신박한 기능도 있었지만, 팔덕의 내용은 대체로 바람을 내거나 가리거나 깔거나 덮을 수 있는 것으로 수렴된다.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게 하는 부채만큼 그 모양이 기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는 물체가 또 있을까 싶지만, 사람들은 부채를 요리도 써보고 조리도 써보며 다양한 장면에서 활용했다.
게다가 더운 여름 내내 그 어떤 친구보다도 가까이 두며 시도 때도 없이 찾았을 부채에 팔덕선이라는 운치 있는 애칭까지 붙여주면서 말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 부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는 어린 손주가 낮잠을 자는 동안 그 옆에 앉은 할머니가 아이가 깨지 않게, 바람이 너무 세지 않게, 천천히 부채질을 해주는 모습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친할머니나 외할머니께서 내가 어린 시절 낮잠을 자는 동안 부채질을 해주셨던 적은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없다. 그러신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낮잠을 자고 있었을 테니 기억을 못하는 것이 당연할 테지만···.

더우면 스스로 부채질을 하면 될 것을 나는 왜 할머니가 손주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장면을 떠올리는 걸까. 하긴 부채질을 해주는 사람이 할머니든 남편이든, 누워있는 사람이 손주든 부인이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부채의 덕스러움이 투영된 '다른 이를 위한 수고스러운 행위'로서의 부채질이니까.
올 여름엔 나도 부채를 옆에 끼고 다니면서 옆에 있는 이들에게 종종 부채질을 해주어야겠다. 그리고 팔덕선의 내용을 참고해 내가 그들을 위해 해주고 있는 이로운 일들에 대해 알려주어야겠다.
“내가 지금 너를 시원하게 해주려고 부채질을 해주고 있고, 자외선 가득한 햇빛도 가려주고 있고, 컵에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뚜껑처럼 닫아주고 있고, 모기도 쫓아 주고 있고···.”
아, 그런데 여기서 아주 작지만 커다란 한 끗 차이로 나는 부채의 덕을 따라갈 수가 없다.
부채는 말이 없고, 나는 말이 많다.
덕에는 말이 없다.
여성경제신문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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