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이의 아취 단상(雅趣 斷想)]
11월의 사물, 화로
화로 앞에 모인 이들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주었을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찾아들고 있다. 

거리의 나무들은 어느새 노랗고 빨갛게 옷을 바꿔 입고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괜히 마음이 쓸쓸하고 혼자 아득해지는 기분이 드는 걸 보니 가을의 한복판이긴 한 모양이다. 

  집 근처 공원도 가을단풍으로 화려하다. /프레스 모멘트
  집 근처 공원도 가을단풍으로 화려하다. /프레스 모멘트

해 뜨는 시간이 늦어져서인지 초등학교 1학년 첫째의 기상 시간도 부쩍 늦어졌다. 어느 날은 아침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이불에서 나오질 않고 혼잣말로 “이불 속이 제일 따뜻하고 안전해”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8살이지만 이미 세상을 다 깨쳤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추워진 날씨에 몸이 굼떠진 아이를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뜨끈뜨끈한 바닥에 이불은 제쳐놓고 굳이 무거운 요를 비집고 들어가 배를 깔고 누워 귤을 한바닥 까먹으며 한없이 책을 보았던 기억···.

솔직히 내가 보았던 것이 줄글 책이었는지, 만화책이었는지, 안방의 텔레비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하튼 차가운 바람이 부는 날들은 나에게 있어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귤 까먹는 계절로 각인되어 있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엔 바닥에 배 깔고 귤 까먹으며 노는 게 진리 /프레스 모멘트

성인이 된 이후에는 추워진 날씨에 떠올릴만한 것이 하나 더 생겼는데 바로 친정아버지 작업실에 있는 난로이다. 온돌이 없는 작업실이라 겨울에는 공기가 너무 차고 활동이 어려운 지경이라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하시다 들여놓은 난로였는데, 난방도 난방이지만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불에 넣어 구워 먹으면 꿀맛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난로의 가장 훌륭한 부산물은 원 없이 때릴 수 있는 불 앞에서 멍때리기, 불멍이었다. 

멍때리기 중에 제일은 불멍이 아닐까 /프레스 모멘트

그 어떤 마술쇼나 공연에 뒤지지 않을 만큼 나의 눈길을 빼앗으면서도, 나를 차분하게 만드는 동시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열망을 끓게 만드는 듯한, 화려하게 반복되는 적막하기 짝이 없는 불의 춤을 보고 있노라면 피곤하고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조금은 회복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현대인들이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텔레비전이나 핸드폰 같은 각자의 불빛 속으로 빠져드는 게 비슷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존 업다이크는 ‘나는 난로(화로)가 지닌 원시적인 매력을 은밀히 이해했다. 텔레비전은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불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원시 인류가 불 앞에 모여 하루를 마무리했다면, 현대인들은 화면 앞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모양의 화로들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모양의 화로들 /국립민속박물관

지금처럼 난방이 잘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날이 추워지면 불 피운 화로를 방 한가운데 놓고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에 손도 쬐고, 고구마나 밤도 구워 먹으며 이야기도 하고, 화로에 올려 뜨거워진 인두로 다림질도 했을 것이다. 아이들은 숯이 타들어 가는 걸 바라보며 내가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멍을 때렸을 수도 있다.

추우면 보일러를 켜면 되는 아주 간편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방 한가운데 운치 있게 화로를 한 대 두고 싶은, 배부른 소리를 마음에 품어본다. 나에게는 따뜻함과 회복의 표상처럼 보이는, 화로 앞에 서로의 어깨를 붙이고 모여 앉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장면이 그립다. 

프레스 모멘트 2025년 달력 중 11월 /프레스 모멘트
프레스 모멘트 2025년 달력 중 11월 /프레스 모멘트

여성경제신문 최진이 레터프레스 작업자·프레스 모멘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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