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감독이 한국의 '혼' 그려낸 작품
가상 아티스트 음악, 빌보드 '정상' 차지
젓가락 밑 휴지 받치는 습관까지 담아내
'케이팝 소재' 아닌 'K컬처 종합선물세트'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케데헌)'. 제목만 보면 어딘가 유치하게 들린다. 케이팝 걸그룹이 악귀를 퇴치한다니 아이들을 겨냥한 판타지 같기도 하다. 미국에서 만든 K-문화를 주재로한 애니메이션이 왜 이토록 전 세계를 열광케하고 있을까.
사실 케이팝을 소재로 한 점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다. 전 세계적 팬덤, 방대한 콘텐츠 자산, 강력한 소비력까지 케이팝은 분명 '돈이 되는 소재'다. 그러나 이 작품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차용을 넘어 한국 문화 전반을 정교하게 녹여냈다는 점이다.
공동 연출을 맡은 매기 강과 크리스 아펠한스 감독은 한국의 정서, 미학, 상징을 세밀하게 설계했다. 케이팝은 이야기의 출발점일 뿐 서사는 '혼문(魂門)'이라는 마법 결계를 무대로 선대 여성 퇴마사들과 그 후계자들이 노래를 통해 악귀를 봉인하는 독특한 설정으로 확장된다.
주인공 루미, 미라, 조이는 걸그룹 '헌트릭스'로 활동하며 악귀로부터 세계를 지키는 비밀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과 맞서는 보이밴드 '사자보이즈'는 하프 데몬 '진우'의 제안으로 결성된 악귀 그룹으로 악마 군주 '귀마'와 함께 혼문을 무너뜨리려 한다. 두 그룹은 음악으로 맞붙으며 극의 중심 갈등을 끌고 간다.

이처럼 음악이 이야기의 핵심인 만큼 수록곡의 완성도는 곧 영화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요소였다. '케데헌'은 이 부분에서도 기대를 뛰어넘었다. 수록곡 7곡이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에 진입했고 빌보드는 "가상 아티스트가 차트 정상을 차지한 것은 역사상 최초"라고 극찬했다. 해당 곡은 오스카 주제가상 부문에도 공식 출품됐다.
헌트릭스의 '골든'은 글로벌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사자보이즈의 '소다 팝'은 중독성 강한 훅으로 주목받았다. 감독들은 블랙핑크, 트와이스, BTS, TXT, 몬스타엑스 등 실존 K-팝 그룹의 퍼포먼스를 치밀하게 분석해 음악과 안무에 녹여냈고 퍼포먼스의 디테일과 현실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보다 놀라운 건 배경과 소품 묘사다. 남산타워, 낙산 공원 산성, 한국식 공중목욕탕 등 실제 장소들이 정교하게 그려졌고 '라멘'이 아닌 '라면', 새우깡을 연상시키는 매운 감자칩, 불닭볶음면 소스를 떠올리게 하는 핫소스 챌린지까지 한국인 일상에서나 나올 법한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젓가락 밑에 휴지를 받치는 습관처럼 사소한 생활감까지 포착해낸 것도 인상 깊다.
현재의 K-팝 소비 흐름도 충실히 반영했다. 잠실 경기장을 연상시키는 대형 무대, 음원 공개 후 이어지는 숏폼 챌린지 열풍, 각 그룹의 상징인 응원 봉, 아이돌 팬 싸인회 등 K-팝 팬이라면 익숙한 풍경들이 애니메이션 속에 그대로 담겼다.

소품 하나에도 깊이가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인검, 신칼, 쌍검은 실제 한국 전통 무기를 기반으로 디자인됐다. 인기를 끈 호랑이(더피)와 새(수씨)의 조합은 민화 '작호도'의 오마주다. 경복궁 전경이나 노리개 장식 역시 섬세하게 구현했다.
그 결과 영화는 'K-팝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K-컬처 종합선물세트'가 됐다. 그 여파는 콘텐츠를 넘어 굿즈 시장으로까지 이어지며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온라인숍의 하루 평균 방문자는 공개 이전 7000명에서 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갓'을 응용한 볼펜은 네덜란드 온라인몰에서 완판되기도 했다. 케이팝을 매개로 한국의 문화유산과 말 그대로 '혼'까지 자연스럽게 전파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영화가 성공한 '이유'를 굳이 분석할 필요는 없다.
모든 성과는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리 대중적인 소재라도 얕은 이해로 접근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다. 특히 케이팝처럼 팬덤의 눈이 가장 날카로운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 문턱을 넘었다. K-팝 문화를 정교하게 읽고 한국적 정서를 섬세하게 엮어낸 이 작품은 한 나라의 문화를 다룰 때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모범 사례가 됐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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