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장기(象棋)에서 영감 받았다 주장
PPL 쏟아내며 수십억 광고 수익 거둬
韓 예능 포맷 침해 20건 중 19건이 中
사전등록·포맷인증 등 제도 보완 시급

이판펑션(一饭封神·한 끼로 신이된다) 프로그램 사진. /바이두 캡처
이판펑션(一饭封神·한 끼로 신이된다) 프로그램 사진. /바이두 캡처

시장 골목 사장님부터 미슐랭 셰프까지 지역과 배경이 다른 '흑백 유니폼'을 입은 셰프 100명이 한 무대에 모였다. 이 중 84명의 '소(小)셰프'들은 닉네임을 단 채 뛰어난 경력을 지닌 16명의 '대(大)셰프'와의 대결권을 두고 경쟁을 펼친다. 완성된 요리 한 접시 앞에서 누군가는 심사위원의 합격을, 누군가는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지난해 9월 넷플릭스를 뜨겁게 달궜던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을 연상케 하지만 놀랍게도 해당 프로그램은 현재 중국에서 방영 중인 이판펑션(一饭封神·한 끼로 신이된다)이다.

듣도 보도 못한 B급 예능이 아니다. 중국 대형 IT기업 텐센트가 운영하는 OTT 플랫폼이 직접 기획한 정규 예능이다. 제작 취지 또한 거창하다. 중국 장기(象棋)에서 장군과 병졸의 구도를 차용해 입성 전부터 탈락률이 높은 서바이벌 구조를 설계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장기 대국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경쟁'을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총괄 프로듀서 자오징(赵婧)은 제작발표회에서 "셰프라는 직업이 지닌 열정과 끈기를 조명하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베낀 구성에 '중국 장기'라는 설정을 덧씌운 해당 설명은 다분히 억지스러워 보인다.

이판펑션 프로그램 중 PPL이 나오고 있다. /바이두 캡처
이판펑션 프로그램 중 PPL이 나오고 있다. /바이두 캡처

실제 프로그램을 시청해 보니 각종 PPL이 난무하다. 저작권 개념이 무색할 정도로 표절한 포맷으로 수십억대 광고 수익까지 거두는 모습은 씁쓸함을 넘어 기만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흑백요리사 방영 당시 중국 누리꾼들은 정지선 셰프의 시래기 바쓰 흑초 강정 요리를 두고 "한국이 중국 문화를 훔쳐 가려 한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런 중국에서 프로그램 전체를 복제한 듯한 '이판펑션'을 내놓은 셈이다.

중국 내부에서 조차 "부끄럽다"는 평이 나온다. 중국 포털 사이트 소후(Sohu)에서 활동 중인 한 평론가는 "오마주로 포장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라며 "국가 망신"이라고 비판했다.

중국판 나는가수다(왼쪽부터), 아빠 어디가, 런닝맨 포스터 사진. /여성경제신문DB
중국판 나는가수다(왼쪽부터), 아빠 어디가, 런닝맨 포스터 사진. /여성경제신문DB

물론 중국 방송계가 처음부터 한국 프로그램을 무단 도용한 건 아니다. 과거 '나는 가수다', '아빠 어디가', '런닝맨' 등은 정식 포맷 수입을 통해 중국판으로 제작됐고 현지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변곡점은 2013년이다.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이 해외 프로그램 수입을 연 1건으로 제한하면서 한국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높아졌지만 공식적인 수입 경로는 사실상 막혔다. 이후 중국 방송사들은 유사 포맷을 자체 제작하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한국 방송사들이 저작권 침해를 이유로 수차례 문제 삼았지만 중국 측은 실질적 유사성을 부인했고 당국 역시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6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한국 예능 프로그램 포맷 침해 사례는 총 20건이며 이 중 19건이 중국에서 발생했다.

한 프로그램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 보자. 무수한 기획 회의 끝에 하나의 콘셉트를 도출하고 그 뼈대 위에 프로듀서, 작가, 연출, 촬영 스태프들이 살을 붙인다. 출연진 섭외부터 세트 제작, 음악 연출, 카메라 구도까지 모든 과정엔 창작자들의 고뇌와 땀이 녹아 있다. '흑백요리사'도 그런 수고의 집합체다.

'중국이 중국했다'는 말이 있다. 한푸, 파오차이 논란에 이어 예능 프로그램까지. 10년 넘게 베끼기를 반복해온 중국 방송계에서 창의성이란 단어는 사치다. 넷플릭스 프로그램을 건드린건 변수다. "내부 대응을 검토 중"이라는 넷플릭스의 공식 입장은 향후 법적 대응 가능성의 신호일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대응 시스템이다. 침해 사례가 반복돼도 뾰족한 대응이 없다. 저작권 사전 등록, 포맷 인증 제도 등 창작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그저 '지켜보기'만으로는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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