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을 결혼시켜” 여성의 섬세함 강점으로
서울~네덜란드~뉴욕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여정
밀폐된 한국 도시에서 피어난, 공동체 향한 디자인
“건축은 체력이다” 끈기로 자연을 관찰한 공간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비롯한 마천루의 숲, 세계적으로 치열한 건축의 격전지 뉴욕. 이곳에서 한 한국인 여성 건축가는 돌과 유리, 강철이 아닌 ‘행복’을 설계한다고 말한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GSD)을 졸업해 미국에서 디자인 철학을 펼치고 있는 정선아 건축 디자이너. 굵직한 공모전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실력을 증명한 그녀의 여정은 단순히 성공한 유학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진심이 어떻게 현실의 벽을 넘어 아름다운 공간으로 구현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10여 년 전 한양대학교에서 한때 혼자 노트에 끄적였던 아이디어는 미국에 유학한 GSD의 자유로운 학풍 속에서 싹을 틔웠다. 단순히 설계의 기술을 넘어 디자인의 근원을 파고드는 인문학의 자양분은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서울에서 실무를 닦은 그녀는 네덜란드를 거쳐 뉴욕 한복판에서 자신의 장인정신을 선보인다.
그녀에게 건축은 단순히 아름다운 형태를 빚는 것을 넘어선다. 그 공간을 사용할 사람, 도시, 자연, 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행인과의 ‘관계’를 엮어내는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이상과 현실을 결혼시키는 일’에 비유한다. 20대 시절 빡빡한 규제와 조건 속에서도 팀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상적인 가치를 심어 넣었던 과정은,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치열한 분투의 증거다.
그녀의 시선은 화려한 뉴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인으로서 우리나라 주거 형태, 특히 ‘밀폐 도시락통 속 반찬’ 같은 아파트의 삶에 대한 통찰은 파격적인 프로젝트로 이어지기도 했다. 0과 1의 흑백 논리처럼 나뉘는 사적 공간과 공용 공간 사이, 우연한 마주침과 일상의 공유가 가능한 ‘0.5의 회색 지대’를 제안하는 그녀의 고민은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온기를 향하고 있다.
섬세한 여성 건축가로서 도면을 놓고 오랜 호흡이 필요한 길을 마주한다. 매일 ‘체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는 그녀. 지금 이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갈망하는 ‘행복의 건축’을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이상을 꿈꾸되 현실에 발 딛고, 자연의 지혜에서 답을 찾아 녹여낸다. 여성경제신문은 가장 인간적인 공간을 탐구하는 정선아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의 학업 경험 중 가장 기억에 남거나, 건축가로서의 지금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나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만 꼽자면 바로 건축설계에서 ‘설계’, ‘디자인’ 자체에 훨씬 더 깊게 천착하는 학풍이었습니다. 인간이 창조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디자인의 밑바탕을 이루는 이론, 역사, 철학 수업들도 놀라울 정도로 풍성했습니다. 덕분에 이전에는 혼자 망상이라 여겼던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키고 재구성할 수 있었죠."
—뉴욕 건축계의 치열함 속에서 디자이너로서 겪는 가장 큰 보람과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또한, 한국 건축가로서 뉴욕 현장에서 일하며 느끼는 문화적 차이나 특별히 요구되는 역량이 있다면요.
"건축가로서 가장 큰 보람은 역시 고생해서 그린 도면들이 실제로 지어지는 걸 보는 것일 겁니다. 그게 대단한 건물이 아니고 그냥 실내인테리어의 한 부분일지라도요. 어려움이라면 치열함, 열정 이런 것들이 가끔 너무 과도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할 말은 없지만 말이에요.
또, 제가 느낀 가장 큰 문화적 차이는, 새로울 것도 없지만 존댓말과 유교가 없는 문화에서 시작되는 거 같아요. 작업을 하고 상사한테 검토나 토의를 요청할 때 상사가 권위적이다는 느낌은 한 번도 못 받았어요. 이건 학교 다닐 때부터 정말 많이 느낀 부분이라 이젠 많이 익숙해진 것 같아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오는 자유도 큰 차이라면 차이고요. 특별히 요구되는 역량은 '주인 의식' 정도? 그런데 이건 이곳이라고 특별히 다른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굵직한 설계 공모에서 연이어 당선되셨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비하인드 스토리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기억에 남지 않는 프로젝트는 없는 것 같지만, 실무에선 특히 제주 첨단과학기술단지 공공임대주택 현상설계 공모 시 모든 팀원이 머리 싸매며 아파트 배치도를 검토했던 게 기억나요. 5~6명으로 구성된 팀으로 각자 자기의 설계안을 가지고 토론하는 시간을 거의 매일 가졌어요.
처음엔 되게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진척이 됨에 따라 여러 생각들이 한 생각으로 수렴하고 너무 이상적인 안들은 가지치기가 되어가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안이 나왔어요. 규제와 조건이 굉장히 타이트한 공동주택 프로젝트라 아주 현실적으로 풀어가면서도 그 사이사이 우리가 꿈꾸는 이상을 심어주려고 노력했어요. 그 점이 높이 평가되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제 디자인 철학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가장 핵심만 이야기하면, 그 공간에서 이용자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이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이 이루어질 수 있냐, 즉 (주어진 현실적 조건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냐(프로젝트 목표)에요.
단순히 이 집에 부모와 자식이 어떤 관계를 맺느냐 이것도 있지만, 이 집과 도시, 이 집과 자연, 이 집과 행인1, 이 집과 행인 1,2 등. 어떤 성격의 지역/대상에 따라 좀 더 획일적일 수 있고 좀 더 자유로울 수도 있죠. 건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행복의 건축’과 여러 가지 조건들의 투쟁이기도 하죠. 이상과 현실을 결혼시키는 일 같아요."
—다양한 수상 경험들이 건축가로서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혹시 가장 애착이 가거나, 지금의 건축관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수상이 있다면요.
"이젠 꽤 연식이 된 학생 프로젝트이지만, 저에게 졸업 설계 1등상(총장상)을 안겨준 한양대 졸업 설계가 아직까진 가장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요. 공간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답이 자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작업이었거든요. 생각을 정리하고 그 속에서 여러 비유와 은유들을 발견하고 제가 그리는 건축 속 등장인물이 행복해할/필요로 하는/원하는 행동 패턴이 가능한 환경을 자연요소/자연의 방식에서 찾은 첫 프로젝트였어요.
자연이 어떻게 그런 환경을 만드나 열심히 들여다보니 답이 보이더라고요.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니까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르겠네요. 열심히 생각하고 관찰하니 가장 자연스럽게 재밌고 행복한 공간이 나와서 결과도 좋았던 거 같아요."
—한국의 주거 형태를 보고 느낀 점과 미래에 바뀔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한국의 주거 형태는 한국의 현실과 생활 방식,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해서 바뀔 필요보다는 잘 가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언덕진 곳에 작은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은 정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재밌는 공간이에요.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인 한국에서만 가능한. 잘 가꿀 두 번째 포인트로는 아파트에 좀 더 다양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편리함과 편안함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쫓다 우리가 잃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예전 학생 프로젝트로, 밀폐 도시락통 속 반찬 같은 아파트 삶에서 벗어난 'Apart from Apartment'라는 다소 반항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었어요. 아파트의 장점은 각종 설비 및 구조의 효율성입니다. 반대로 아쉬운 점은 한 유닛 내에 모든 실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내부와 외부, 내 집과 공용공간 이 두 사이의 차이가 흑백으로 갈려요. 0과 1사이 0.5와 같은, 세미 정장 느낌의 공간이 적어요. 우연히 누굴 마주치거나 일상이 공유되거나 하는 일이 최소가 되죠. 그나마 발코니가 그 역할을 했었는데 이젠 모두 발코니 확장을 해서 더욱 경계가 뚜렷해졌죠.
아파트 유닛간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 주거환경에서 필요한 각 실(침실,거실,주방,식사하는 곳, 기타)들을 모듈화시켜 나누고 이를 기둥구조에 약간의 무작위성을 갖고 쌓는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각 유닛당 할당되는 면적은 같지만 어떻게 쌓였는지에 따라 층고가 아주 높은 집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건축을 공부하고 현업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건축가이기에 겪었던 특별한 경험이 있으셨나요? 또한, 건축 분야로 진출하려는 여성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건축은 되게 이론적이면서도 감각적이고 또 공학적인 면도 강한 재밌는 분야에요. 그런데 또 아티스트처럼 내가 그리고 싶은 기린 그림을 도면에 그리면 안 되죠. 항상 누가 이 공간을 어떻게 쓸지,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지를 염두하고 프로젝트에 임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진행시킬때 생길 수 있는 모든 변수나 조건들, 심미적인 것들을 목표와 함께 굉장히 복합적이고 섬세하게 캐치해야하는데, 그런 예민함이 여성들한테 더 특화된 성격이 아닌가 싶어요. 거의 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느낍니다.
여성 후배 건축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첫째도 둘째도 체력입니다. 일 자체가 고강도이기도 하고, 또 그 호흡이 긴 분야니까요. 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정말 여러 프로젝트에 투입이 되었는데 회사생활 하다 보면 몇 년 동안 같은 프로젝트 하는 동료들도 정말 많았어요. 씨를 뿌리고 수확물을 거두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분야니 체력만큼 중요한 게 없는 거 같아요."
—앞으로 건축가로서 이루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나, 건축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지금 시대가 부지불식간에 원하는 공간과 환경 구현하는 일을 계속 하는것이 궁극적인 목표예요. 어떤 형태나 스케일이나 프로젝트 성격, 대상에 구분 없이. 행복의 건축. 공공성과 사회적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는 언제나 환영이고요."
정선아(Jeong sun ah) 건축 디자이너는?
학력
한양대학교 건축대학 건축학사 (2008~2014)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건축석사 (2019~2023)
수상
한양대 졸업논문 최우수상 (2013)
서울 건축문화제 우수상 (2013)
서울애니메이션 센터 현상설계 공모 당선 (2016)
해비타트 코리아 아이디어 공모 우수상 (2017)
제주 첨단과학기술단지 공공임대주택 현상설계 공모 당선 (2017)
디자이너 경력
공간 종합건축사 사무소 (2014~2017)
쿠움파트너스 (2019)
MVRDV 네덜란드 로테르담 (2021~2022)
AWO 뉴욕 (2023~2024)
오브라아키텍츠 뉴욕 (2024)
시겔디자인 뉴욕 (2025)
여성경제신문 이상무 기자 sewoen@seoul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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