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고령 운전자 한열희 씨
운전 경력 40년 총 120만km
"80년대 나이 40에 운전했죠"

빨간색 프라이드 앞에서 색안경을 끼고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붉은 스카프를 휘날리는 그녀는 1942년생 올해 만 81세 고령 운전자 한열희 씨다. /김정수 기자
빨간색 프라이드 앞에서 색안경을 끼고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붉은 스카프를 휘날리는 그녀는 1942년생 올해 만 81세 고령 운전자 한열희 씨다. /김정수 기자

"여자는 집 가서 밥이나 하라고 소리치면 이미 잘하고 나왔다고 받아쳤죠 뭐. 1980년대 그 시절 여성 운전자는 참 운전하기 힘들었어요."

빨간색 프라이드에 앉아 색안경을 끼고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붉은 스카프를 휘날리는 그녀는 1942년생 올해 만 81세 고령 운전자 한열희 씨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31일 여성경제신문과 만난 한 씨는 운전에 도전했던 것이 제일 잘한 일이라고 했다.

여성 운전자로서 순탄하지 않은 일상을 보낸 1980년대. 차를 몰고 나가면 '여자가 무슨 운전이냐'는 등 무시 발언은 일상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고령 운전자에게 운전이란 주체적인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한 씨. 본지가 40여년 간 총 120만km 지구를 55바퀴 돈 한 씨의 운전 일기를 읽어봤다.

"여성 운전자가 없던 시절 남편이 제게 운전면허를 따보라고 하더라고요. 많은 부부가 그랬듯 남편은 직장인 저는 주부였죠. 남편이 운전하다가 기둥에 부딪힌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그 이후로 운전을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운전하기 시작하면서 남편 출퇴근도 시켜줬어요. 당시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자·남자의 역할이 뒤바뀐 드문 풍경이었겠죠. 그렇게 40세 나이에 운전을 시작했어요."

한 씨가 면허를 땄던 1980년대는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시기다. 여성의 삶은 주부에 머무르지 않았다. 60~70년대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불가피해졌고, 81년 대우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기혼 여성을 고용하면서 여성 취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성 운전자에 대한 시각은 '후진국' 수준이었다. 

"한번은 남편 퇴근 시간에 데리러 가려고 가다가 택시 잘못으로 부딪힌 사고가 있었어요. 차 사이드미러가 부서졌죠. 피해는 내가 입었는데 택시 운전사가 제가 초보에 여성이니 적반하장으로 나오더라고요. 지나가던 다른 택시 운전사들은 '봉 잡았네' 하면서 지나갔어요. 제가 만만하니 '돈 뜯기 딱'이라는 말이었죠. 실랑이를 벌이다가 남편이 근처에 있으니 남편 부르겠다고 강경하게 말하자 그제야 합의하자면서 태도를 바꾸더라고요. 기분 나쁘면서 씁쓸했죠."

무시당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때는 여자가 운전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그냥 지나가다가 창문 내리고 '아줌마 집에 가서 밥이나 해요' 하면서 소리 지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럼 저는 '밥 다 해놓고 왔으니 걱정마쇼'라고 똑같이 소리 지르며 대응했죠. 그럼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고요. 그 시절엔 이런 일이 기본이었어요."

여성 운전자로서 순탄치 않은 운전 생활을 보낸 한 씨는 이제 고령 운전자가 됐다. /김정수 기자
여성 운전자로서 순탄치 않은 운전 생활을 보낸 한 씨는 이제 고령 운전자가 됐다. /김정수 기자

여성 운전자로서 순탄치 않은 운전 생활을 보낸 한 씨는 이제 고령 운전자가 됐다. 그에게 고령 운전자로서 힘든 점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밤이나 비 올 때 운전할 때 겁나기 마련이죠. 어두워서 차선이 잘 안 보이거나 시야가 흐리니까요. 최대한 비 오거나 어두워질 땐 운전 안 하려고 해요. 피할 수 없을 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행하면서 가죠."

최근 고령 운전자 사고가 잇따르면서 고령자 운전 규제가 화두에 올랐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22년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건수는 전년 대비 8.8% 증가했다. 고령 운전자의 증가세도 가파르다. 국회입법조사처 조사 결과 2012년 이후 최근 10년간 고령 운전면허 소지자 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10.2%로 나타났다.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한 고령 운전자가 조금씩 늘어도 65세 이상 운전면허 자진 반납률이 매년 2%대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되면 내년에는 전체 고령 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498만명이 운전면허 소지자일 것으로 전망된다.

고령화사회에 따라 △노인 수 증가 △고령 운전면허 소지자 증가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 건수 증가 현상은 모두 비례한다. 심재익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들었고,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상황인 만큼 전체 인구 중 고령 인구 비율이 높아졌다. 그에 따라 고령 운전자도 증가했기 때문에 사고 확률·가능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했다.

한 씨에게 고령자 운전 규제에 관해 물었다. "고령자 운전에 대한 불안한 시각은 이해하죠. 저는 치매 예방약을 복용하고 있고 일 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치매 검사를 받고 있어요. 또 3년마다 운전자 적성검사를 받고 있죠. 굉장히 조심하면서 운전하고 있어요. 시야가 안보이던가 귀가 잘 안 들린다면 면허를 반납해야죠. 아직은 제가 직접 운전하는 게 편해요. 오히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더 불안하더라고요. 또 경기도 외곽에 살 땐 마트 한 번 가려면 버스 타는 데까지 2~30분 걸어서 배차간격 한 시간이 넘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어요. 운전하지 않으면 생필품 구하기도 어려웠죠. 그렇다고 요즘 젊은이들처럼 택시 부르는 것도 앱으로 해야 하니 쉽지 않더라고요. 운전을 도무지 놓을 수가 없는 상황이죠."

한 씨에게 운전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했다. /김정수 기자
한 씨에게 운전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했다. /김정수 기자

한 씨에게 운전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선물이라고 했다. "주변에 장을 보고 무거운 짐을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자식들 불러서 차 탈 때까지 기다리는 친구들을 많이 봤어요. 참 새삼스럽더라고요. 저는 제가 운전하고 짐 나르니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죠. 쇼핑을 한가득할 때도 '이걸 어떻게 들고 가지'라는 걱정을 한 적도 없고요. 그럴 때 운전이 참 편리하다고 느꼈어요. 또 남편과 둘이 살 땐 자식 도움 없어도 둘이 놀러 다니기 좋았죠. 남편은 다리가 불편해서 오래 걷지 못했어요. 버스 타러 가는 길조차 힘들었죠. 제가 운전을 안 했다면 남편은 집에 발이 묶인 거나 다름없었어요. 정기적으로 병원 갈 때 등 필요한 순간에 영락없이 자식들을 불러야 했을 텐데 제가 운전을 하니 그것도 알아서 다녔죠. 나이 들어도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운전이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운전을 시작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 순간은 언제냐고 물었다. "나중에 남편이 아프고 나니 제 운전이 우리 부부에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피부로 느꼈죠. 남편이 하늘나라로 가기 전 제게 바깥 공기 쐬며 마음껏 돌아다니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둘이 자주 갔던 식당 사장님은 '할머니가 운전해서 나이 들어도 두 분이 이렇게 외식하는 거 보면 참 대단하세요. 부러워요'라고 했고요. 그럴 때 참 운전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련기사

저작권자 © 여성경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