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 칼럼]
대리 투표·중복 투표 가능성
위원 전원 책임지고 물러나야
부정선거 당위성 높여주는 꼴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해 말 기자회견을 통해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관리"라는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선거 관리 과정에 대한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최근 발생한 ‘사전투표 용지 반출’ 사건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번 사건은 과거의 ‘소쿠리 투표’ 논란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소쿠리 투표’는 투표용지를 소쿠리에 넣게 해 비밀 투표 원칙이 훼손될 수 있었고 그래서 투표용지 관리 부실이 문제로 지적됐던 사건이다. 반면 이번의 투표용지 반출 사건은 그보다 더 심각하고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선관위는 이 사건에 대해 “투표소 마감 결과 관외 사전투표자의 투표용지 발급 매수와 투표함 내 회송용 봉투 수가 정확히 일치하여 반출된 투표지는 없었다”며 “투표소 밖에서 대기하던 모든 선거인이 빠짐없이 투표한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해명하며 사과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선관위의 해명이 ‘수치상의 일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은 ‘수치상의 일치’가 아니라 ‘대리 투표’ 혹은 ‘중복 투표’의 가능성에 있다. 만약 외부로 반출한 투표용지를 받은 유권자가 다시 투표소로 돌아와 투표를 했을 당시 신분 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가 핵심이다. 만일 그러한 확인 없이 투표가 진행됐다면 투표용지를 받은 사람과 실제 투표한 사람이 동일인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대리 투표’ 혹은 ‘중복 투표’ 발생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마디로 선관위가 이번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며 만약 인지하고도 이러한 방식으로 사건을 수습하려 했다면 이는 의도적인 사안 축소로 볼 수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포시 장기동 행정복지센터의 관내 사전투표함에서 2024년 제22대 총선 투표용지 한 장이 발견된 사건도 충격적이다. 해당 용지는 김포시 갑 선거구 국회의원 선거용으로 정식 관인이 찍혀 있었으며 2번 박진호 후보에게 기표된 상태였다.
이는 곧 22대 총선 개표 과정에서 한 표가 분실되었음을 의미한다. 만일 개표 당시 이 한 표의 분실을 인지했다면 끝까지 찾아야 했고 인지하지 못했다면 개표 과정이 부실하게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관위는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표현하며 ‘귀중한 한 표’를 강조해 왔지만, 이번 사건은 그 ‘귀중한 한 표’가 얼마나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반복되는 사건들로 인해 유권자들은 선거 절차의 투명성은 물론 선관위의 전반적인 관리 역량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선관위가 어떤 설명을 하더라도 유권자들이 이를 신뢰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관위가 아직도 유권자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가족 회사’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며 ‘소쿠리 투표’ 사건으로 선거 관리 능력에 이미 의구심이 제기된 상황에서 이번 사건까지 벌어진 것은 선관위의 현실 인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선관위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장관급에 해당하는 선관위원 전원이 책임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과거 ‘소쿠리 투표’ 사건 당시에는 중앙 선관위원장 한 명만이 사퇴했지만, 그 이후에도 선거 관리 수준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전원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특히 유의할 점은 책임을 하위직 공무원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재 선관위의 선거 관리에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하위직 공무원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하위직 공무원들은 선거 때마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해 왔다. 그런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정작 고위직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현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설령 지금 선관위가 개선 의지를 드러낸다고 해도 선관위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부정선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관위가 현재 보여주는 모습은 오히려 그러한 주장의 당위성을 높여주는 꼴이다.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선관위는 과연 고쳐 쓸 수 있는 조직인가?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세계지역학회 부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총무이사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