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BMW·폭스바겐 작년 영업익 급감
탈원전·러시아산 에너지 공급 중단에
에너지 요금 폭등으로 생산 거점 이동
탈원전 해놓고 프랑스산 원전 전기 수입

한때 제조업 기술을 기반으로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던 독일이 최근 몇 년 새 높은 에너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신음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패권을 선점하기 위해 각국이 에너지 확보에 사활을 거는 가운데 독일은 국가 경쟁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다.
에너지 다소비 국가이지만 전체 에너지의 96%를 수입해 쓰는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미래 방향성에 독일의 사례가 던지는 함의가 적지 않다.
21일 여성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공장 문을 닫거나 인력을 줄이고 주변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는 등 ‘탈(脫)독일’에 나서고 있다.
업계 최강으로 꼽히는 독일 자동차 3사는 최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BMW는 2024년 회계연도 순이익이 전년 대비 37% 감소한 76억7800만 유로(약 12조2159억원)를 기록했다. 폭스바겐은 같은 해 영업이익 191억 유로(약 30조3886억원)을 내 전년 대비 15%가 줄었으며 메르세데스-벤츠도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0.8% 급감했다.
이 여파로 폭스바겐은 독일 내 공장 10곳 중 3곳을 폐쇄해 수만명 규모의 일자리를 감축하고 직원들의 급여를 10%씩 삭감하는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BMW는 올해 영업이익(EBIT) 마진 전망치를 기존 8∼10%에서 6∼7%로 낮췄고 그 여파로 주가가 폭락했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업체 콘티넨탈은 작년 7150명의 일자리 감축을 선언했고 올 초 2026년까지 자동차 연구개발 부문 3000명 감원을 추가로 발표했다. 자동차 부품 및 전동 공구로 유명한 보쉬(Bosch)는 2032년까지 독일 내 사업장에서 3800명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5500명을 감축할 계획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화학 기업 바스프(BASF)도 2023년 독일 루트비히스하펜 공장 일부 폐쇄를 포함해 2600개의 일자리를 감축한다. 125년의 역사를 가진 브랜드이자 ‘고장 안 나는 세탁기’로 유명한 독일 가전 기업 밀레(Miele)도 자국 내 일부 공장을 폴란드로 이전한다.
한때 제조업 기술을 기반으로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던 독일이 이러한 사태를 맞이한 건 에너지 비용이 폭등한 영향이다. 독일산업연합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독일 기업 가운데 59%가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려는 이유로 ‘에너지 안보 및 비용’을 꼽았다.
독일 정부가 지난 23년간 탈원전 정책을 추진해온 데다 러-우 전쟁으로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 공급이 막혀 전력 생산 능력을 대거 상실한 것이 에너지 요금 폭등의 핵심 원인이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여성경제신문에 “독일은 2000년 태양광과 육상 풍력 확대를 골자로 하는 재생에너지법을 제정하고 2002년 원자력법을 개정하며 세계 최초 탈원전 정책을 수립했다”며 “2009년 출범한 메르켈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지를 시도했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급속도로 탈원전 기조로 돌아섰다”고 설명했다.
메르켈 총리는 2011년 3월 원자력 발전소 8기 가동 중단 결정을 내렸다. 그해 5월엔 2022년까지 원전 가동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목표는 코로나 팬데믹 영향으로 1년 늦춰졌으나 결국 이행됐다. 독일의 전력 생산에서 원자력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5년 14%, 2022년 6%로 줄어든 뒤 2023년 이후 0%가 됐다.
그 결과 지난해 독일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60%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땐 문제가 생길 줄 몰랐다. 작년 겨울엔 ‘어두운 침체’를 뜻하는 ‘둥켈플라우테(Dunkelflaute)’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이는 바람이 불지 않고 구름이 가득한 날이 며칠 동안이나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둥켈플라우테 현상은 독일 내 풍력·태양광 발전량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원전이 없는 독일은 화석 연료 발전을 늘렸지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전기료가 치솟았다. 지난해 겨울 독일의 도매 전기 가격은 한때 1㎿h당 936유로(약 146만원)를 기록하며 평소의 10배까지 치솟았다.
독일은 이를 메우기 위해 에너지를 주변국에 의존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해 독일이 전기를 수입한 주요 국가는 프랑스(12.9TWh), 덴마크(12.0TWh), 스위스(7.1TWh), 노르웨이(5.8TWh) 등이다. 독일이 전력을 가장 많이 수입하는 프랑스는 원전 발전 비중이 전체의 약 70%를 차지한다. 독일은 탈원전을 선언해놓고 원전 전력을 끌어다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이 타격을 받았다. 러-우 전쟁 직전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석탄 45%, 석유 34%, 천연가스 50%를 수입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며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나섰고 러시아는 그 반대급부로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원유 공급을 통제했다.
탈원전 정책에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이 타격을 받아 치솟은 전기요금에 독일 산업계가 입은 타격은 매우 컸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독일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0년 ㎿h당 173.4달러에서 2023년 220.1달러로 30% 인상됐다. 업계에 따르면 독일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OECD 평균 대비 60% 이상 높은 수준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막히자 이를 주원료로 사용하던 화학 부문이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독일화학산업협회(VCI)에 따르면 러-우 전쟁의 여파로 독일 내 화학 기업 10곳 중 1곳은 생산을 영구 중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기료가 치솟으면서 평소 전력 소비량이 높은 철강, 플라스틱, 배터리, 자동차 등 독일의 핵심 산업계 역시 일제히 생산 감축에 나섰다. 동시에 비싼 전기료가 제조 비용에 고스란히 반영되면서 수출 경쟁력도 악화했다.
이러한 독일의 사례가 한국이 던지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한국은 지난 정부 당시 독일의 탈원전·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벤치마킹 하여 에너지 정책을 운영했다. 탈원전으로 원전 생태계가 붕괴되어 다시 회복하는데 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가운데 정치적 이념 분쟁으로 또다시 갈지자 행보를 보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일이 탈원전 정책을 어쨌거나 강력히 추진하고 있으나 세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2017년 현재 전 세계에서 새로 추가된 원전 설비 용량이 2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많은 국가가 탈원전으로 인한 기후 온난화 리스크가 원전을 계속 가동함으로써 발생되는 리스크보다 훨씬 크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석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 원전소통지원센터장은 “독일 경제 위기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원인”이라며 “탈원전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독일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경제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독일은 2023년 4월 탈원전을 완료했지만 러-우 전쟁의 발발로 저렴한 천연가스 수입도 어려워지면서 전기 가격이 급격히 상승했고 독일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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