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美 기업 혁신 막는 외국 정부 대응 예고
구글·오픈AI 등 해외 빅테크 AI 규제 완화 요구
과기정통부 AI 기본법 하위 법령을 마련 조치
"한국 정부, 글로벌 압력 속 신중한 조율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외국 정부의 규제에 관세 부과 등 보복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인공지능(AI) 규제가 한미 통상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해외 빅테크 기업들도 한국의 'AI 기본법'이 기업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며 규제의 명확성과 유연한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21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내달 2일 전 세계 무역 상대국을 대상으로 상호 관세 부과를 예고한 가운데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한국 정부의 AI 규제 사례를 면밀히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바이든 행정부가 시행했던 AI 관련 행정명령을 폐기하고 새로운 AI 정책을 수립 중이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AI 행동 정상회의에서 "과도한 규제가 급성장하는 AI 산업을 위협할 것"이라며 AI 안전 행동 규약 선언문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미국 내 한국 경제 싱크탱크인 한미경제연구소(KEI)는 최근 기고에서 "한국의 디지털 규제가 미국 행정부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특히 플랫폼 규제가 미국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지 않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구글, 오픈AI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도 한국의 AI 규제 환경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지난 13일 서울 구글코리아에서 열린 미디어 라운드테이블에서 엘리스 프렌드 구글 AI·신흥 기술 정책 총괄과 유니스 황 아태 정책 담당은 "한국의 AI 기본법이 기술 혁신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황 담당은 "AI 기본법이 명확한 정의를 갖추고 혁신 친화적인 방향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며 "고영향 AI(High Impact AI) 개념이 지나치게 광범위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며 "오진 위험이 있는 질병 진단 AI는 고영향 AI로 볼 수 있지만 병원 예약을 돕는 AI 챗봇도 같은 기준을 적용받는 것은 문제"라고 설명했다. 고영향 용어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자칫 혁신을 억제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프렌드 총괄도 "AI 기술 자체를 규제하기보다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AI 기본법이 한국 AI 시장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실제 규제 내용은 기업의 혁신을 제한하는 부분이 있다"며 "AI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면 기업이 예측할 수 있는 규제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AI 산업은 대규모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빠른 혁신과 선제적 기술 개발이 경쟁력의 핵심으로 꼽힌다. 특히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유연한 규제 환경을 바탕으로 기술 상용화를 앞당기고 있으며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술력과 인재, 시장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신현한 연세대 경영대학 교수에 따르면 메타,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 미국 빅테크 5개사의 시가총액은 총 12조 달러에 달하며 S&P500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이들은 2020년 이후 700건 이상의 M&A를 단행했으며 평균 인수 금액은 약 2조원에 이른다.
반면 한국 대기업들의 M&A는 위축됐다. 지난해 M&A 건수는 전년 대비 62% 감소한 60건에 불과했고 1조원 이상 규모의 인수는 5건뿐이었다. 이에 업계에서는 규제 불확실성과 신사업 정책 방향의 모호함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구글 외에도 오픈AI 아태 정책 총괄 쿤바타나간, 어도비·AWS·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소속된 BSI(Business Software Alliance)는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방문해 AI 기본법 관련 의견을 전달했다. BSI에는 어도비, AWS, 마이크로소프트 등 70여 개 글로벌 IT 기업이 소속돼 있으며 이들은 고영향 AI 정의와 이용자 보호 범위 등에 대해 질의하며 유럽연합(EU) 식 강력 규제보다 국내 상황에 맞는 현실적인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 1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5년도 과기정통부 핵심과제 보고회'에서 "AI 기본법이 인공지능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안전과 윤리를 확보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며 "최소한의 규제로 혁신을 장려하고 필요한 경우에만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과기정통부는 산업계·학계·법조계 전문가들과 함께 AI 기본법 하위법령 초안을 마련 중이다.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KOSA)도 의견 수렴 창구를 열어 AI 투명성·안전성 확보, 고영향 AI 기준, 사업자 책무 등에 대한 의견을 받고 있다.
이재성 중앙대 AI 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해외 빅테크 기업들이 요구하는 '유연한 적용'에 대해 "해외 기업들은 AI 규제를 사전에 적용하기보다 기술을 먼저 출시한 후 문제가 발생하면 규제를 받는 방식을 선호한다"며 "정부가 추진하는 '최소 규제 원칙'이 기업의 기대와 부합하지만 국민 입장에서 보면 AI가 초래할 부작용에 대해 우려하기 때문에 규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AI 규제를 자국 기업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만큼 한국 정부의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며 "정부는 글로벌 기업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있도록 AI 기본법의 시행 방향을 신중하게 조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성경제신문 김성하 기자 lysf@seoulmedi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