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정치In]
北 핵 개발 중단됐어야
색안경 낀 주관적 희망
미래 위해 도움 안 돼

지난 9월 20일,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을 맞아 열린 '전남 평화회의' 기조연설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미국 대선 이후 새 정부가 출범하면 북미대화 재개가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그럴 때 우리가 과거처럼 '패싱' 당하고 소외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문 전 대통령의 언급을 들었을 때 당혹감이 들었다. 전직 대통령의 상황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전직 대통령이라면 북미 대화 재개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북미 대화의 ‘주제’에 관심을 보여야 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만일 그가 그런 관심을 가졌더라면 “패싱”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북미 대화 재개의 목적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서일지, 아니면 북한과의 핵 군축 협상이 목적일 가능성이 큰지에 대한 구분이 선행됐어야 했다는 것이다.
만일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된다면 트럼프는 북한과 핵 군축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유력한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워싱턴의 미국기업연구소(AEI) 행사에서 북한, 이란 등의 핵무기 능력이 미국보다 앞섰다고 말했는데, 이런 언급은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핵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핵 군축 협상에 나설 경우 북한은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으로서 지위를 인정받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북미 대화 과정에서의 우리 정부의 소외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우리의 대북 정책의 핵심은 북한의 비핵화인데,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대화에 우리가 참여하려고 노력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 26일 IAEA의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은 “2006년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이 된 후 국제적 관여가 없었고 핵 프로그램 또한 상당히 확대됐다”라고 언급하며 “서로 대화하지 않는 상황을 멈추고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런 발언은 IAEA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가 북미 대화에서 패싱 당하면 안 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한마디로 문 전 대통령의 언급은 상당한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문 전 대통령의 "평양공동선언의 실천 방안으로 평화의 안전핀 역할을 하던 9·19 군사합의가 현 정부에서 파기돼 한반도는 언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라며 "지금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위험하다"라는 언급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이 한반도 평화의 토대를 마련했었는데 윤석열 정권이 이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인식도 문제인 이유는 한반도 평화의 가장 근본에는 북한의 핵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문 전 대통령이 현 정권의 대북 정책을 비판하며 자신의 대북 정책을 자화자찬하려면 최소한 자신이 집권했을 당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했거나 아니면 핵 개발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IAEA 사무총장이나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북한은 문 정권 당시에도 계속 핵 개발에 매진해 왔다. 상황이 이렇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윤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비판, 비난할 입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주관적 입장, 즉 진영 혹은 특정 정당의 입장에서 현실을 판단하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전직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가 원로로서 현실을 냉정히 판단하고 국민과 정부에게 ‘객관적인’ 조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에게 문 정권 당시의 대북 정책을 반성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도 현재의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남북 관계를 바라보고, 이에 입각한 합리적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과거라는 색안경을 끼고 현재를 바라보며, 주관적 희망을 말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
한국세계지역학회 부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총무이사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