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긴 여름이 지나고 드디어 가을
잊고 있던 순간들이 다시 보인다

며칠 사이 계절이 바뀌었다.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더니 하늘도 높아진 것 같다. 진즉 9월이었지만 지난 추석 연휴까지는 가만 앉아 있어도 이마에 땀이 맺혔는데 드디어 가을이 등장했다. 이 좋은 계절, 집에만 머물 수는 없어 주말 약속을 잡았다. 마침 한 친구가 보고 싶은 전시가 있다고 했다. 더워서 꼼짝하기 싫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움직인다.
긴 팔 셔츠가 어울리는 날씨, 차창 너머 바람을 맞으며 달라진 계절을 보고 싶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기로 했다. 세상에, 이제서야 노란 색을 띤 나뭇잎이 보이고 가로수 은행나무의 꼬릿한 냄새가 코 밑을 채운다.
“잊었던 음악을 듣는다.
잊었던 골목을 찾고
잊었던 구름을 찾고
잊었던 너를 찾는다 (중략)”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니, 나태주 시인의 시구(‘가을날 맑아’ 중)가 딱 떨어진다. 금세 무덤덤해지겠지만 달라진 계절에 감탄하고 다시금 보이는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우연이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보러 간 전시도 그런 감흥을 배가시킨다.
서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미나 페르호넨 디자인 여정: 기억의 순환’은 텍스타일 디자이너 미나가와 아키라가 창업한 브랜드의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전시다. 텍스타일을 기반으로 지난 30년간 제작해 온 옷, 식기, 가구, 인테리어 소품 등이 선보이는데 제품에 사용된 도안 하나하나가 ‘직물에 쓰는 시, 일상 속 특별한 기억을 품다’란 설명을 고스란히 표현한다.
구름, 새싹, 나무, 새 등 모든 원단 디자인을 직접 손으로 그려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이 각각의 도안에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는 게 놀라웠다.
‘손의 흔적은 기계적인 작업과 달리, 호흡과 의식으로 눈과 손, 마음의 떨림을 주워 담은 것이다’라는 디자이너의 말을 염두에 두며 제품을 보니, 일상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하며 그렸을 디자이너의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자연스레 잊고 있던 내 주변의 기억들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았는데 화단에 조성된 나무들이 어느새 훅 자랐던지 걷는 기분이 확실히 달라졌다. 웃자란 나뭇가지도 그 끝에 맺힌 열매도 반가운 시간이 돌아왔음을 알려줬다. 마침 남편도 집에 있었는데 워낙 오랜 친구들이라 간만에 만들어진 이 자리가 왁자지껄 반가울 뿐이다.
안부는 근황으로 요즘 빠져 있는 것들과 관심사로 이어지며 유쾌한 수다가 시간을 잊은 채 펼쳐졌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사이인데, 이렇게 재미있게 사는 친구들인데, 이렇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데, 잊고 있었다. 오전에 기억했던 시의 다음 구절이 떠올랐다.
“아, 너 거기
그렇게 있어 줘서
얼마나 고마운가 좋은가
나도 여기 그대로 있단다
안심해라 손을 흔든다”
주변과 일상에서 다시 의미를 찾고 공감과 위안을 주고받는, 넉넉한 계절 가을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