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섭의 은퇴와 마주 서기]
텃밭 식구가 달라졌어요
왕성하게 자라는 무·배추
조롱박 속에 커가는 가을

지난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지구 온난화를 체감이라도 하는 것일까? 9월 중순이 되었는데도 더위는 물러갈 줄 모른다. 30도가 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사계절이 있는 살기 좋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다. 어김없이 가을이 올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그 무더위 속에 텃밭 주인공들도 바뀌었다. 상추, 아욱, 시금치, 근대와 붉게 익어 맛을 내던 토마토가 무대 위에서 제 역할을 다 마치고 무대 뒤로 사라졌다. 남은 줄기는 다 뽑아 버리고 흙은 다시 갈아엎었다.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기 위해 거름과 비료를 뿌리고 땅을 골랐다. 사정없이 달려드는 풀을 방지하기 위해 골라 놓은 밭 두둑에는 비닐을 씌웠다. 거름에서 발생하는 가스가 날아가도록 열흘을 보낸 후, 구멍을 뚫어 가을 김장용 무를 한 구덩이에 두세 개씩 뿌렸다.

뿌린 무씨는 사흘이 지나기 무섭게 파란 싹을 틔웠다. 모래알처럼 단단하던 씨앗에서 어김없이 새 생명이 태어난다. 덮어 놓은 흙을 살포시 열고 솟아나는 새싹은 여간 예쁘고 귀여운 것이 아니다. 떡잎 두 개 쏙 내민 것이 두 귀 쫑긋 세운 새끼 토끼 같기도 하다. 귀를 먼저 내밀어 세상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 바람 소리, 빗소리, 새소리가 이들의 탄생을 축하해 주는 것 같다.
새싹은 태어나면 성장 속도가 빠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찾을 때마다 놀라게 된다. 무는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우지만, 배추는 모종을 사다 심는다. 무는 태어난 자리를 옮기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씨앗을 뿌린 곳에서 다 자라 수확할 때까지 기다린다. 하지만 배추는 모판에서 우수한 종자를 싹틔워 어느 정도 자란 모종을 옮겨 심는다. 무와 배추가 텃밭에서 자라기 시작하면 가을 김장 준비는 끝난 거나 다름없다.

수원에서 텃밭을 하는 처제가 쪽파씨를 주었다. 빈 땅에 꾹꾹 심어 놓으면 난다고 했다. 비좁은 텃밭이라 큰 기대 안 하고 가지 나무 아래 꽂아 놓았더니, 사흘도 안 되어 싹이 나고 싱싱하게 자라올랐다. 파김치를 해 먹어도 좋고 모든 반찬에 양념으로 썰어 넣으면 맛을 더한다.

여름내 따 먹었던 가지는 가을까지 열리는 작물이다. 올해 가장 많이 수확한 것도 가지다. 삶거나 익혀서 간장 양념해 먹으면 좋은 반찬이 된다. 식구 수가 적어 가지는 따올 때마다 이웃에 나누어준다. 한여름 따가운 햇볕에 가지를 길게 썰어 말려두면 한겨울에 식감 좋고 쫄깃쫄깃한 말린 가지볶음을 즐길 수 있다. 칼로리가 낮고 수분이 94%나 되어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하지만, 가지의 안토시아닌 색소는 항암효과가 있다고 한다.

텃밭 입구에 늘어진 조롱박 넝쿨에 가을이 익어간다. 조롱박은 넝쿨식물로 울타리나 지붕을 타고 올라간다. 조롱박이 커갈수록 가을 깊은 곳에 있게 된다. 박은 지금처럼 플라스틱 바가지가 없을 때 유용한 생활 도구였다. 박속을 비워내고 말리면 단단한 바가지가 되어 쌀과 보리쌀을 일구거나 할 때 사용했다. 작고 오목한 것은 약수터 물가에 비치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목을 축이는 물바가지로 활용하기도 했다.
박 바가지는 결혼을 앞둔 신붓집에 함 팔러 가면 액운을 때운다고 문 앞에 엎어 놓아 밟고 지나가게 했다. 상갓집에 갔다 올 때도 바가지를 밟아 액땜하도록 했다. 어쨌거나 박이 커가고 있다는 것은 가을이 깊어진다는 신호다. 가을 소식과 함께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는 어느 틈엔가 사라지고, 무·배추는 하늘을 닮아 푸르게 텃밭을 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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