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 지구, 오사카의 숨겨진 이면
재개발 갈등 속 빈곤과 소외의 상징
동자동 쪽방촌과 유사한 도시 문제

두 팔을 벌려 만세를 외치고 있는 글리코상. 동전 파스부터 입맛을 돋우는 과자까지 없는 게 없는 돈키호테. 난바에서 우메다로 이어지는 오사카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번화가. '일본 감성'을 찾는 한국인들을 사로잡는 '포인트'다.
과연 이게 전부일까. 글리코상을 볼 수 있는 미도스지선 난바역에서 불과 세 정거장만 이동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도부쓰엔마에역 근처의 아이린 지구. 오사카 사람들은 이곳을 '절대 방문하면 안 된다'며 '빈민가' 혹은 '슬럼가'로 표현한다.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의 어두운 이면을 대표하는 이곳은 수십 년간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터전이다. 이곳은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 이면에 남겨진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주는 아이린지구를 13일 여성경제신문이 찾았다.
아이린 지구를 처음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지는 점은 묘한 고요함과 그 속에 스며든 절망감이다. 오사카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곳 거리는 생기가 없다. 주인이 없는 건물들이 즐비하고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다. 쓰레기 더미 사이로 텐트를 치고 임시 거주 공간을 마련한 노숙인도 보인다. 자전거 주차장은 밤이 되면 이들의 안식처가 된다.

아이린 지구는 일본의 전후 복구 시기 수많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불황기 동안 실업자들이 이곳에 몰려들며 간이 숙박소, 흔히 '도야'라고 불리는 곳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경제는 전후 재건을 위해 수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이곳은 노동자들의 주요 거점이 됐다. 1960년대부터 형성된 인력시장 '요세바'가 이곳의 '슬럼화'를 앞당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 구조가 변화하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들며 이곳은 서서히 '슬럼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활기 넘치던 노동자들의 마을이었지만 이제는 빈곤과 소외의 상징으로 남았다.
히로유키 오사카 사회복지연구소 교수는 여성경제신문에 "아이린 지구는 오사카의 산업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지역"이라며 "지금은 일본 경제의 불균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히로유키 교수는 "이 지역은 경제적 성공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으며, 잊힌 사람들의 터전이 되어버렸다.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린 지구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린 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한 오래된 건물을 찾았다. 이곳은 현재 노숙인들의 임시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벽은 금이 가고 페인트가 벗겨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아이린 지구의 한쪽 끝에 자리한 텐노지 공원이라 불리는 곳은 노숙인들의 집합소다. 공원의 벤치에는 몸을 뉜 채 잠을 청하는 이들로 가득했다. 곁에는 생활의 흔적이 담긴 배낭과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공원 한편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노숙인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고 그들은 짧은 인사와 함께 음식을 건네받은 후 다시 자리를 찾았다.
한 노숙인은 "여기가 내가 밤을 보내는 유일한 곳"이라며 "매일 밤 이곳에 와서 잠을 청한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하루를 버티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지만, 아이린 지구를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에게 이곳은 삶의 마지막 지점이자 희망이 사라진 곳이었다.

오사카시는 아이린 지구의 재개발을 추진 중이다. 아이린 지구를 둘러싼 재개발 계획은 오랜 기간 오사카시와 주민들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오사카시는 여러 차례 이 지역을 재개발하여 오사카의 이미지를 개선하고자 했지만, 주민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주민들은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자신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더욱 줄어들고 결국 거리로 내몰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주민은 "정부는 우리를 몰아내려고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갈 곳이 없다"고 호소했다. 그는 "재개발이 단순히 지역을 정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자체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아이린 지구는 서울의 동자동 쪽방촌과 유사하다. 한국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쪽방촌은 아이린 지구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들 지역은 모두 저소득층, 노숙인, 일용직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빈곤과 사회적 소외가 공통된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고바야시 교수는 두 지역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하며 "아이린 지구와 동자동 쪽방촌은 모두 대도시의 발전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이들 지역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외와 고립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환경 개선을 넘어서 주민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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