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유리, 자연의 시간이 깃든 예술
제주 해변에서 자연의 이야기를 담다
"단순한 조각 아닌 시간의 흔적이다"

무심코 해변에 던진 유리병이 깨져 강산이 서너 번 바뀌는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사진은 AI 챗봇 챗GPT가 그린 해변에 떨어진 유리 조각 이미지 /챗GPT
무심코 해변에 던진 유리병이 깨져 강산이 서너 번 바뀌는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운 보석이 된다. 사진은 AI 챗봇 챗GPT가 그린 해변에 떨어진 유리 조각 이미지 /챗GPT

때는 1970년 여름. "세상 더러워서 못 살겠네! 에잇!" 실연을 당한 걸까. 20대 청년이 손에 쥐고 있던 소주병을 해변 모래사장에 던진다. 산산조각 난 소주병 조각은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흘렀다. 오랜 세월 바다에서 다듬어진 유리 조각들. 휘몰아치는 물에 깎이고 쪼개졌다. 모래 알갱이에 부딪혀 날카로웠던 유리는 영롱한 보석처럼 매끄러워졌다.

강산이 네 번은 변했다. 2024년 한 남자가 조용히 해변을 거닐며 자연이 남긴 흔적을 모은다. 멀리서 보면 흔히들 줍는 조개껍데기 같겠지만 그가 모으는 건 다름 아닌 유리 조각이다. 그렇다. 수십 년 전 실연을 당한 20대 청년이 홧김에 던졌던 소주병에서 나온 그 유리 조각이다.

자연의 흔적을 찾는 이 남자는 수십 년 동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유리 조각을 모아 영롱한 작품으로 환생시킨다. 버려져 반세기를 떠돌던 유리 조각을 모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이 남자, 한익종 작가다.

"인생과 인생이 모여 추억을 만든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바다 쓰레기'일지라도 나에겐 영롱한 보석이다. 시간이 모여 만든 추억으로 작품을 만들어 다시 누군가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한익종 작가가 '비치코밍'을 통해 만든 작품들 /김현우 기자
"인생과 인생이 모여 추억을 만든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바다 쓰레기'일지라도 나에겐 영롱한 보석이다. 시간이 모여 만든 추억으로 작품을 만들어 다시 누군가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한익종 작가가 '비치코밍'을 통해 만든 작품들 /김현우 기자

한익종 작가는 제주도에서 비치코밍이라는 독특한 활동을 통해 환경을 지킨다. 비치코밍은 해변에 떠도는 유리 조각 등을 수집하는 행위다. 비치(Beach)에서 코밍(Combing)하듯 무언가를 줍는 행위를 일컫는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얻은 자원들로 아름다운 공예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 작가는 "단순한 유리 조각이 아니다. 자연이 만들어낸 시간의 흔적을 담은 이야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한 작가의 여정은 단지 예술 활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제주도의 자연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자 한다. 비치코밍을 통해 수집된 자원들은 새로운 가치로 태어난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는 조금씩 더 깨끗하고 아름다운 섬으로 변한다.

비치코밍하고 있는 한익종 작가 /한익종
비치코밍하고 있는 한익종 작가 /한익종

한익종 작가의 이야기는 단순히 예술가의 삶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어떻게 지키고 보존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작품들은 제주도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 우리의 마음속 깊이 울림을 준다.

25일 제주시 한경면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 문을 여성경제신문이 열어봤다.

— 비치코밍을 통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마음속 깊이 울림을 준 순간이 있다면.

"하루는 파도가 잔잔한 날이었다. 해변을 걷다 우연히 작은 파란색 유리 조각을 발견했다. 너무나 작은 조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 조각이 바닷속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졌을지 내 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품었을지를 상상해 봤다. 그 순간 단순한 유리가 아니라 시간과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치코밍은 이런 순간들을 통해 나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주곤 한다."

"인생과 인생이 모여 추억을 만든다. 누군가에겐 단순한 '바다 쓰레기'일지라도 나에겐 영롱한 보석이다. 시간이 모여 만든 추억으로 작품을 만들어 다시 누군가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 한익종 작가가 제주시 한경면에 위치한 자신의 작업실 '알나만'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비치코밍'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김현우 기자

— 비치코밍이란 무엇인지 설명 부탁한다.

"비치코밍은 해변을 거닐며 바다로 떠밀려 온 유리, 조개껍데기, 나무 조각 등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다양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활동을 말한다. 주로 사용하는 바다 유리 조각은 오랜 시간 파도에 의해 다듬어져 자연이 만든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리 조각들을 활용해 장신구나 장식품 같은 다양한 공예품을 만드는 것이 나의 주요 작업이다."

한익종 작가가 비치코밍 한 유리 조각들 /김현우 기자
한익종 작가가 비치코밍 한 유리 조각들 /김현우 기자

— 어떤 과정으로 작품을 만드는지.

"바다 유리는 보통 20년에서 50년 이상 바닷속에서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완성된다. 유리 조각을 찾아내는 것은 보물찾기와도 같은 과정이다. 하나하나 주워 모아 깨끗하게 세척한 뒤 이를 다시 창의적으로 조합하여 작품을 만든다. 유리의 색상과 질감 그리고 그 유리 조각이 어떤 물건의 일부였을지를 상상하며 작업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고 즐겁다."

— 비치코밍이 단순히 예술 활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환경 보호나 사회적 기여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는지.

"비치코밍은 단순한 수집을 넘어 환경 보호 활동의 일환이기도 하다. 해변에 떠밀려온 폐기물 중 일부는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이 된다. 이를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시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공예품 제작 과정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일자리와 교육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얻는 수익은 다시 지역 사회와 환경 보호를 위해 쓰이도록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 싶은 게 내 꿈이다.

단순히 개인 예술가로서의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비치코밍과 같은 활동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사회적 기업 모델을 구축하고 싶다. 단순히 수익 창출을 넘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 작가의 작업실에 있는 작업대. 이곳에서 1000개가 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 작가는 전했다. /김현우 기자
한 작가의 작업실에 있는 작업대. 이곳에서 1000개가 넘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 작가는 전했다. /김현우 기자

— 굵직한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며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들었다. 도심에서 편하게 은퇴 후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제주도로 내려왔을까.

"은퇴 후의 삶, 즉 현재 나의 인생을 '인생 3막'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과 즐거움을 찾는 과정이다. 비치코밍은 그 과정에서 내가 발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자 환경 보호와 예술을 결합한 활동이다. 이 활동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가치를 전달하며 살고 싶다. 이 모든 것이 저에게는 봉사의 연장선이며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제주도의 해변을 거닐며 비치코밍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난 유리 조각들이나 자연의 흔적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내가 느꼈던 감동과 깨달음을 다른 이들도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 작품이 그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연이 남긴 흔적들이 단순한 조각을 넘어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

제주도의 해변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설 예정이다. 그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그 길 끝에서 다시 한 번 자연과 삶이 주는 의미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에 위치한 한 작가의 작업실 '알나만'. '알자', '나가자', '만들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 비치코밍을 하는지 알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나가고, 더 나은 가치를 이루기 위해 만들자는 것. /김현우 기자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에 위치한 한 작가의 작업실 '알나만'. '알자', '나가자', '만들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 비치코밍을 하는지 알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나가고, 더 나은 가치를 이루기 위해 만들자는 것. /김현우 기자

"바닷가를 거닐며 수많은 세월 마모된 보석 같은 유리 조각이나 부유목, 그리고 해외에서 먼 길을 여행해 왔을 법한 희한한 물건들을 주으며 “심봤다”를 외치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 순간의 환희에 휩싸이게 되니 비치코밍은 거기에 더해 '추억'이라는 보물을 하나 더 얹어 주는 취미활동이다." - [한익종 더봄] 융·복합형 취미, 비치코밍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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