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연속 총선 참패 근본적 원인은
정치 지형에서 소수파로 전락
40·50, 20년 전처럼 진보 지지
| 보수 정당이 연이은 총선 참패로 실의에 빠졌다. 중산층이 무너진 상황을 간과한 탓이다. 한국 사회를 떠받치는 중추 세력인 이들은 진보 정당 손을 들어줬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부동산 가격 폭등은 가처분 소득 급감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당정 갈등은 판을 뒤흔드는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생활물가 급등에 따른 불만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취임 2주년을 맞은 윤석열 대통령도 "봄은 깊어 가는데 민생의 어려움은 쉬 풀리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다"며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여성경제신문이 정치·이념·경제·정책 관점에서 계층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고 새롭게 재편된 질서에 맞는 정부의 역할을 따져본다. [편집자 주] |
![[그림] 과거 총선 의석수 변화를 나타낸 그래픽. 19대 때 과반이었던 보수 정당이 이후 하락세를 보였다. /여성경제신문 DB](https://cdn.womaneconomy.co.kr/news/photo/202405/223140_432584_5259.jpg)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의 패배 이유로는 민주당이 밀어붙인 '정권심판론'이 통했다는 평가가 많다. 정권심판론은 대개 정권 말기에나 통했지만 이번에는 정권 2년 차에 강하게 휩쓸었다. 여당에선 백가쟁명식 해석이 나오지만 결국 윤 대통령의 소통 부족으로 수렴된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최근 세 번의 총선에서 연달아 졌다는 점에서 단순히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운영 잘못으로만 패배 원인을 단정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번 총선 전 국민의힘에 악재가 터져 나왔던 것은 맞지만 민주당도 양문석 후보의 편법 대출, 김준혁 후보의 여성 막말 논란 등 악재 속에서 선거를 치렀다.
불통이라는 문제는 민주당 인사에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박용진·박광온·임종석을 날린 '비명횡사' 공천 파동은 이재명 대표의 불통 이미지를 강화했다.
국민의힘이 참패한 원인은 이미 정치 지형에서 보수가 소수로 전락한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거 전략은 부수적인 변수였다. 과거엔 진보가 소수여서 중산층을 껴안아야 이길 수 있었는데 보수가 소수이고 보수가 합종연횡해야 이길 수 있는 구조가 고착화됐다.
진영 간의 각축전은 19·20·21·22대 총선[그림]을 거치면서 진보의 승리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2012년 새누리당이 152석으로 과반을 근소하게 넘겼는데 2016년엔 122석으로 줄어 제1당 자리를 내줬다. 2020년 야당일 때 103석, 2024년 여당일 때도 108석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반면 민주당은 안정적으로 상승세를 굳혔다.
70~80년대 경제발전 중산층 증가
'보통 사람' 시대 건설 붐에 보수화
김대중·노무현, 단일화 고육지책
보수가 정치 지형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을 때는 중산층 지지 기반이 있었다. 중산층은 1970~80년대 산업화 기간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늘어났다. 그 이전엔 부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이 농촌에 거주하는 농경사회였다. 1950년대 후반 전체 노동인구 가운데 농민이 80%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은 보릿고개를 넘나드는 빈곤층으로 다수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했다.
빈곤층이 중산층으로 계층상승을 이뤘던 기간도 있었다. 박정희·전두환 개발독재 시대였다. 지난 19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부자들만 이용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면서 모든 국민에 혜택이 돌아간 것이 단적인 예다.
'한강의 기적' 여파로 국민이 자신감을 느끼자 중산층은 경제적으로 복지 대신 성장을 중시하는 쪽으로 보수화됐다.
1987년 노태우 후보는 '보통 사람'이란 선거 슬로건을 내세워 당선됐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는 여당이 과반 확보에 실패해 여소야대 국면이 시작됐다. 다수당 야당에 의해 국정 운영에 견제를 받자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보수가 굳건히 사회의 주류가 되게 정계 개편을 했다.
1992년 대선에서도 보수 진영 당권을 장악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됐다. 2위인 김대중 후보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이후 번복해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진보 진영은 늘 열세였기 때문에 중도를 끌어안으려는 시도 없이는 승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진보 진영은 시행착오 끝에 물고기(중도)를 잡는 방법을 터득했다. 1997년 대선 전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 후보와 단일화 및 공동 정권에 합의하는 'DJP 연합' 승부수를 띄웠다.
지역적으로 호남에 국한된 진보 진영이 충청을 끌어안은 덕에 이회창 후보를 1.53%포인트 격차로 따돌리며 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를 했다. DJP 연합은 정권 초기 진보 진영이 권력을 나누는 걸 감내하면서 원만히 유지되다가 중반기 들어 양측의 결별이라는 파국에 이르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로 대권주자로 부상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발판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후보 지지 철회로 중도 통합력에 약점을 보여주면서 임기 내내 보수 진영과 동교동계의 공세에 시달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2030 세대가 20년 후 4050 세대가 됐지만 2022년 대선 때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050은 이번 22대 총선에서도 진보 성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방송 3사의 비례대표 투표 정당 출구 조사에 따르면 40대는 70.7%(더불어민주연합 32.5%, 조국혁신당 38.2%)가 50대는 63.6%(더불어민주연합 25.1%, 조국혁신당 38.5%)가 진보 정당을 지지했다.
양승함 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40~50대가 중산층의 허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성향이 늘었다"며 "옛날에는 진보 지지층이 20~30대가 많았고 40대가 반반, 50대 이상이 보수 성향이었는데 이게 민주화의 여파로 한 단계 올라갔다"고 말했다.
현재 비상이 걸린 국민의힘은 총선 백서를 만들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어떻게 하면 다시 이기는 정당이 될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조정훈 총선 백서 TF 위원장은 "가장 뼈아팠던 지적은 이 상태로 아무것도 안 하면 만년 '이등 병장'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무너진 중산층을 되살려 우군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보수 진영이 선거에서 판판이 깨질 수밖에 없는 위기감을 드러낸 것이다. 본지 기획 '중도의 역습' 다음 편에서는 보수 정당이 선거 지형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진보 정당이 득세한 점을 경제적 배경에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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