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그래미 어워드의 트레이시 채프먼을 보며
팝뮤직에 빠졌던 10대를 떠올렸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트레이시 채프먼이 부르는 ‘fast car’와 애니 레녹스가 시네이드 오코너를 위해 부른 ‘Nothing Compares 2 U’를 들을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 @recordingacademy/GRAMMYs
그래미 어워드에서 트레이시 채프먼이 부르는 ‘fast car’와 애니 레녹스가 시네이드 오코너를 위해 부른 ‘Nothing Compares 2 U’를 들을 수 있었다. /인스타그램 @recordingacademy/GRAMMYs

80년대에 10대를 보냈다면 좋아하는 팝스타가 한두 명은 있을 것이다. 라디오 청취가 지금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빈 시간을 채워주었던 때였고, ‘황인용의 영팝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전영혁의 음악세계’ 등 팝 전문 프로그램도 채널별로 방송되어 팝송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때였다.

90년대 힙합과 아이돌이 본격 등장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이 확장된 이후에는 국내 가요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지만, 내가 학창 시절이었던 그때에는 라디오 방송뿐 아니라 ‘월간팝송’, ‘음악세계’, ‘핫뮤직’ 등 팝 음악 팬들을 위한 잡지까지 여러 종 발행됐을 정도로 팝 스타와 팝송이 친근하던 시기였다.

마이클 잭슨과 프린스의 경쟁 구도, 신디 로퍼에 이어 등장한 마돈나 등 스타들의 시시콜콜한 정보를 읊어주던 친구도 있었고, 메탈리카와 스키드로우 등 귀를 때리는 강렬한 사운드에 열광하던 친구도 있었다.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연습하던 친구, 밥 딜런과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가사지를 읽어 가며 노래를 감상하던 친구까지 그 당시 우리들은 팝 뮤지션과 그들이 선보이는 음악과 메시지를 나눠가며 팝송을 즐겼다. 포크, 블루스, 록, R&B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또 다른 장르의 곡들이 화려하게 펼쳐졌던 80년대 팝신은 새로운 감성을 찾는 젊은이들이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라디오를 즐겨 듣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건 지난 2월 4일 열린 제66회 그래미 어워드 때문이다. 마침 설 연휴에 재방송이 되었는데, 콘서트마다 몇백만의 관중을 몰고 다니며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활약상이 궁금해 채널을 고정했다(그녀는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며 역대 최초 4회 수상자라는 그래미의 역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방송이 시작되고 얼마 후 기대하지 않았던 무대가 펼쳐졌다. 익숙한 기타 리프와 함께 트레이시 채프먼이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 그녀의 히트곡 ‘패스트 카(Fast Car)’를 커버한 컨트리가수 루크 콤즈와 함께한 듀엣 무대였다. 사전에 시상식 관련 기사를 읽지 않았던 터라 그녀가 그래미 무대에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방 안에 앉아 수도 없이 리플레이했던 ‘Fast Car’를 이렇게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숨을 멈추고 볼륨을 높였다. 블랙 셔츠를 입은 단단한 모습의 그녀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저음으로 읊조리듯 조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트레이시 채프먼은 강경 보수를 표방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임기 말인 1988년 데뷔한 포크 뮤지션이다. ‘Fast Car’는 그녀의 데뷔 앨범 ‘Tracy Chapman’(1988)에 수록된 곡으로 가출한 어머니를 대신해 알코올중독에 빠진 아버지를 부양하며 편의점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한다. ‘질주하듯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떠나보는 상상을 하며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난 미래를 막연하게 그려낸다.

백인의 음악이라 생각됐던 포크 음악을 하는 흑인 여성 뮤지션이라는 점과 노래를 통해 전하려 했던 당시의 세태에 대한 울림 있는 경고가 그녀를 80년대 팝신에서 특별한 자리에 위치하게 했다. 그해 그녀는 이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인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광을 가졌다. 

35년 전 흑인 여성의 자조 섞인 노래를 지금 백인 남성이 불러 다시금 공감을 일으켰다는 것은 소외감과 격차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한다는 뜻일 수 있다. “당신은 빠른 차를 갖고 있지요 / 하지만 우리가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빠를까요? /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해요 / 오늘밤 떠나든지 이런 식으로 살다가 죽을지.” 결과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삶이지만 어떻게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그녀의 노래는 현실적이어서 더 위로됐다. 대학 시절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날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내가 20대에 즐겨 들었던 또 한 곡의 플레이리스트가 연주되었는데, 유리스믹스의 보컬인 애니 레녹스가 부른 ‘낫싱 컴패어스 투 유(Nothing Compares 2 U)’가 그것이다. 작년에 타계한 시네이드 오코너를 기리는 무대였는데, 삭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의 그녀야말로 그 어떤 가수보다 시네이드 오코너의 느낌을 살려낼 수 있었다고 본다. 여성으로서 마주하는 사회적 부조리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활동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어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1985년 1월 28일, 수십 명의 미국 팝스타들이 모여 아프리카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다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넷플릭스
1985년 1월 28일, 수십 명의 미국 팝스타들이 모여 아프리카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다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넷플릭스

오랜만에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있으니, 팝송을 들으며 위로받았던 그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소환됐다. 음악과 평상시의 행보를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했던 팝스타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 역시 세상을 확장하며, 이해하고, 꿈꿀 수 있었다.

음악은 힘이 있었고, 팬덤은 나를 성장시켰다. 내친김에 넷플릭스에 찜해놓은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으로 채널을 돌렸다. 1985년 단 하루 동안 수십 명의 팝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프리카 구호 기금 마련을 위해 ‘We are the world’를 녹음한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오늘은 이렇게 어린 시절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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