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세상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하는 봄은
시 읽기 딱 좋은 계절이다

딸아이의 책상 앞 벽에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본격 수험생 모드로 들어서서인지 매일 ‘피곤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가 어쩐 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적어 놓았는지 의아해하며 천천히 읽어 봤다.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 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은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신경림 작가의 시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창비시선 218 ‘뿔’ 중)인데, 교과서에 실린 작품인 것 같다. 필사를 해서 붙여 놓은 것을 보면 시가 전한 감흥이 특별했다는 건데, 여유 없이 지내는 지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엿보여 안타까웠다. 서두르지 않고 숨을 고르며 봄을 느끼고 싶은 마음, 감수성 높은 열일곱 아인데 오죽하랴. 바람 쐬러 나갈 여유, 꽃을 떠올릴 여유를 원하는 마음을 펜에 담아 꾹꾹 눌러쓴 시구구나.
며칠 전 아이가 무심하게 건네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학교 운동장에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 찍은 학급 단체 사진인데, 교복을 갖춰 입고 발그레한 볼에 웃음기 가득한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벚꽃 필 때 나와서 사진 찍는 것, 우리 학교 전통이잖아. 학교 뒷산에 벚꽃이 어마어마해” 교실 창 너머로 그 벚꽃을 바라보며 적었던 시일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시는 이렇게 마음을 투영하고, 키우고, 확장한다. 같은 문장이지만 읽는 이마다 다른 상(像)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의 향연이다. 시인의 상상력에 안내받아 잊고 있던 특별한 한순간에 도착하는 짧은 여정이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시집을 열지 않았다. 흔히들 쓰는 ‘시를 읽지 않은 시대’라는 말은 그 짧은 여정을 잊고 지내는, 그러니까 내 안에 넣어둔 어떤 것을 찾아가 오롯이 지켜볼 여유가 없는 시대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시에 눈길을 주고 그 여정을 시작하는 순간 잊고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잠시라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마침 얼마 전 문학과지성사(문지사)와 창비의 특별한 시선집이 출간됐다. 문지시인선 600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와 창비시선 500 기념 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이 그것이다.
문지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창비시선은 1975년 신경림 시인의 <농무>부터 시작했으니 어림잡아 오십 년 가까이 시와 함께하는 여정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오랜 시간 서점 한쪽에 꿋꿋이 존재하며 한국의 시를 전해온 중요한 역할을 해온 두 시인선으로 한국의 시 역사와 함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올해 초에는 문학과 지성사의 527번째 시인선인 김혜순 작가의 <날개 환상통>의 영어판 <Phantom Pain Wings>이 한국 작가 최초로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시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문지시인선 600호는 시가 아니다. 501호에서 599호까지 시집 뒤표지에 담긴 시인의 글들을 모았는데 제목 역시 허수경 시인의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의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어떤 이는 말(言)을 부리고 어떤 이는 말과 놀고 어떤 이는 말을 지어 아프고 어떤 이는 말과 더불어 평화스럽다. 말은 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고 말은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가곤 했다.’ 영락없이 시로의 여행을 권하는 특별한 초대장이다.
창비의 기념 시선집은 지난 50년을 뒤돌아보며 창비시선 400번대 시인들이 직접 즐겨 읽는 시들을 소개해 묶어냈다. 시인들의 안내에 따라 한국 시의 지난 50년을 돌아볼 수 있는 이 시집의 제목은 창비시선 1호에 실린 신경림 작가의 ‘그 여름’의 한 구절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왔다’에서 차용했다.
오랜만에 시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신경림 작가의 시 ‘갈대’를 폈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나에게 필요한 여행이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