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의 성과 인권]
아픔·질병·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정
나 또한 돌봄 받을 수 있다는 데 대한 상상·인정 필요
누구나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장애’ ‘질병’ ‘노화’에 대해 돌봄을 받는 것이 민폐가 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사회는 돌봄을 받는 사람을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 지안은 하루 종일 누워 있는 할머니를 위해 마트의 카트를 가져와 이불로 꽁꽁 싸매서 카트에 태우고 동네 달구경을 나간다. 달을 바라보며 “좋다”고 하는 할머니를 보며 지안은 마음의 공허함을 위로받는다. 지안은 근무를 마치고 오자마자 할머니 식사며 기저귀를 살펴야 한다. 겉으로 보기엔 일방적 희생 관계로 보이겠지만, 지안에게 할머니는 삶을 지탱하게 하는 버팀목이다. 그 둘은 상호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다.
그때 또 다른 돌봄자가 동참한다. “너, 부모님은 계시니? 할머니에게 다른 자식은? 손녀는 부양의무자가 아니야. 자식도 없고 장애가 있으면 요양원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어. 여태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사람도 없었어?” 그 아저씨의 돌봄으로 할머니는 편안하게 요양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지안은 독박 돌봄에서 해방된다. 고립된 돌봄에 아저씨가 등장하고, 또 다른 돌봄 지지자들이 등장하면서 지안의 삶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됐다.
인권과 관련된 강의를 하다 보니 ‘사회복지사’ 자격이 필요할 수 있겠다 싶어 몇 년 전부터 학점은행제도를 통해 틈틈이 사회복지사 자격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온라인 강의를 통해 교육을 받았지만 160시간의 실습은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뤄 왔었다.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새해의 첫 미션은 사회복지사 실습 완료다. 1월 4일부터 실습 과정에 들어갔다.
내가 실습하기로 한 곳은 강남에 위치한 실버타운(유료 노인복지주택)과 데이케어센터가 같이 운영되는 곳이다. 실습은 실버타운에 거주하시는 회원의 욕구를 파악해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데이케어센터 어르신들에게 식사·서비스 지원을 하거나, 프로그램을 보조하는 업무다.
데이케어센터는 치매를 비롯한 질환을 가지고 있는 분,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지원하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는 시설이다. 실습 기관에 오시는 대부분의 어르신은 치매 환자였다. 내 부모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아픔에 제대로 다가갈까⋯ 두려움과 걱정으로 어르신들을 만났다. 사실 몇 년째 치매로 자신을 잃어 가는 엄마를 보며 치매에 대한 이해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어르신들을 보니 우리가 다 다른 사람이듯 치매도 여러 종류의 치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데이케어센터의 업무는 어르신들이 타고 있는 승합차에서 안전하게 타고 내리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르신이 버스에서 내리시면 우선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 신는다. 그리고 겨울 코트와 모자, 지팡이를 잘 받아야 한다. 그다음은 혈압과 맥박, 체온 체크로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에 센터에 도착한 어르신들이 항상 보는 프로그램은 ‘아침마당’이다. 이 프로그램은 건강과 관련된 토크가 자주 진행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건강과 관련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는 ‘건강 문제 극복기’ 혹은 건강을 위한 의사의 조언 같은 유형의 토크였다. 마치 모든 질병이 노력하면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질병을 얻은 것은 이렇게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비록 신체 건강은 잃었지만 어떤 희망을 가지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은지, 내가 누군가를 잘 돌보고 돌봄을 받아야 할 때 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것에 대한 학습이나 훈련 등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렇게 치매 환자가 많은데도 말이다.
노인요양시설, 데이케어센터는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곳인가? 절대 그렇지 않아야 한다. 실습하면서 신체 거동이 불편하니 몸의 불편만큼 생각 또한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치매 어르신에 대한 잘못된 편견임을 알게 됐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으로 어마어마한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담긴 ‘인간 책’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란 것에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몸이 불편해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는 노인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온 긴 스토리를 가진 한 사람의 인격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아프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활기차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질병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아픔’ ‘질병’ ‘죽음’은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우리 인생의 한 과정이다. 우리는 늘 앞으로만 전진하는 것이 옳은 삶의 방식이라고 배워 왔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는 습관엔 상대적으로 익숙지 않다. 뒤를 볼 때 거기에 나의 부모님이 계시고, 요즘 내가 만나는 수많은 ‘인간 책’의 삶이 있다. 그리고 나의 미래 또한 거기에 있다.
나 또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상상과 인정이 필요하다. 그 시선으로 돌봄을 바라볼 때 돌봄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나도 타인을 돌볼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필요할 때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그런 권리가 자연스럽게 충족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돌봄을 받는 민폐의 공포에서 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